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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자의 창] '9번 고객'의 아내

Los Angeles

2008.03.14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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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순 논설위원
이른바 '9번 고객'으로 알려진 엘리엇 스피처 뉴욕 주지사의 '콜걸 스캔들'로 연일 시끄럽다. 뉴욕의 고급 매춘조직을 소탕 '미스터 클린'이라 불린 장본인이 성매매를 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그보다는 이같은 섹스 스캔들 때마다 남편 곁에 서는 부인들에 대한 비판이 더 뜨겁다.

ABC의 토크쇼 '더 뷰'에서 공동 호스트로 출연한 여배우 우피 골드버그와 유명 앵커 바바라 월터스는 대형 화면에 비친 뉴욕 주지사의 기자회견을 보면서 "그녀는 왜 저기 서 있는 거죠? 잘못은 남편이 했는데!"하며 화두를 던졌고 이어 CNN.뉴욕타임스 등 주류언론에서 계속 이슈로 다룸으로써 정치인 아내들에 대한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불륜을 저지른 정치인들이 부인을 대동하고 공개적 사과를 하는 것은 미국의 도덕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관행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87년 민주당 대선후보인 게리 하트의 불륜이 보도되자 마자 부인은 남편의 유세장으로 단숨에 달려갔고 클린턴 대통령의 '르윈스키 사건'때 힐러리도 남편 옆에 섰다.

이들 정치인 아내들의 '스탠바이 유어 맨'(Stand By Your Man)이 이번에 새삼 부각된 이유는 하버드 법대 출신으로 자아의식이 강한 변호사 출신의 뉴욕 주지사 부인이 남편 옆에 서서 너무도 슬픈 표정을 지어 사람들로 하여금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해 결국 '저러면서 왜 나와 섰지?'하는 생각을 갖게끔 했기 때문이다.

TV에서 기자 회견을 본 중년의 한 미국인 남성은 "스캔들 자체는 사실 새로울 것 없다. 나의 충격은 그 옆에 선 부인의 얼굴을 본 순간"이었다며 그렇게 까지 하면서 나올 필요가 뭐냐고 반문했다. 이제까지는 사람들이 관례로 문제삼지 않았다가 이번에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면서 '그렇게 까지 할 필요 있냐'는 소리가 나오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그 자리를 피하면? 한 정치가 아내의 말처럼 온갖 억측으로 기자들이 가족까지 추적해 그 자리에 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약자를 보호해 주려는 미국인들의 '기사도'적인 정서가 저변에 깔려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미국인에게 '약한 자'란 비록 큰 잘못을 저질렀어도 그로 인해 사람들의 맹렬한 비난을 받아 육체적.정신적으로 힘들고 괴로운 처지에 놓이면 그가 보호해야 할 대상이 된다. 위기에 처한 사람은 먼저 구해 놓고 시시비비는 기운을 회복한 다음에 따지는 것이 신사다운 것이다. 게임할 때 상대가 넘어지면 기운차려 일어설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과 같다. 대상이 가족일 때는 더욱 그렇다.

섹스 스캔들로 국민의 집중 포화를 받는 공직자 남편은 '나를 배신한 미운 남편'이기 이전에 쓰러져 힘들어 하는 '약자'로 받아 들이기 때문에 그 옆에 서서 모멸의 순간을 함께 해줄 수 있다는 얘기다.

4년 전 뉴저지 주지사가 '동성애 스캔들'로 사임할 때 옆에서 미소로 일관했던 부인은 후에 자서전에서 "딸이 커서 신문사진을 보고 아빠가 가장 힘들었을 때 엄마는 어디 있었냐고 물을 것이란 생각 때문에 그 자리를 견뎌낼 수 있었다"고 한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스탠 바이 유어 맨'을 감행한 정치인 아내들이 "마치 본능으로 남편 옆에 서야 할 것 같았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들의 정서로는 바람 핀 남편을 '보호 대상 0순위'로 받아들여 먼저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자신도 카메라 앞에서 치욕을 견딘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지금 일부 여권운동가들은 '이같은 관행은 없어야 하다'고 하지만 미국의 '좋은 것' 중에 하나란 생각이 든다. 뉴욕 주지사 부인은 힐러리처럼 완벽한 표정관리(?)에 실패해 비난을 받고 있지만 자신의 틴에이저 세 딸들에게는 미국의 '신사도' 정신을 훌륭히 보여 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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