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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산책] 은은예찬(禮讚)

New York

2017.05.01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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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은 자 / 시인
도종환 시인은 '은은함에 대하여' 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은은한 것들 아래서는 짐승마저 순한 얼굴로 돌아온다고. 은은함이 강물이 되어 흘러가는 꽃길을 따라 그런 빛깔로 흘러갈 수 있다면 좋겠노라고.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은은하게 물들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겠노라고.

은은한 것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튀는 색보다 은근한 색에 똑 부러지는 말투보다는 끝을 맺지 못하는 줄임표에 뭉클해진다. 시로 묻고 시로 대답했던 옛사람들, 은유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주인공이 영화의 내용을 이끌어가는 사람이라면 엑스트라는 분위기다. 사람들은 주인공의 얼굴은 기억해도 엑스트라의 얼굴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면 영화를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살면서 은은하게 기억되는 장면들은 없어서는 안 될 저력이다.

"왜 그런지 큰 꽃보다 작고 자잘한 꽃이 좋더라." 하시며 작은 꽃들에 애착을 보이시던 어머니도 우리 가족에 있어서는 엑스트라였다. 이북에서 월남해 자수성가하신 아버지의 안 보이는 뒷배경이었고 자식들의 뒷장면이었다. 없는 듯 있는 듯 평생을 사셨던 나의 어머니에게 나이가 들수록 고개가 숙여진다.

나의 어머니는 작은 꽃을 좋아하셨다. 어느 곳을 가든지 작고 자잘한 꽃들을 보면 고개를 숙여 향기를 맡으셨다. 너무 작아 지나치기 쉬운 꽃들을 소중하게 바라보시던 어머니. 크고 향기가 짙은 꽃은 그것 하나로 꽃이 되지만 작은 꽃은 키를 낮추고 눈을 맞춰줄 때 꽃이 되는 것을 알고 계셨다.

은은함에는 겸손함이 묻어 있다. 은은함의 빛남이 좋다. 은은함에는 눈부심이 있다. 은은한 사람을 만나면 탄광에서 보석을 채취한 기분이다. 후우- 불면 엷은 섬광이 빛나고 깊은 내면이 돋보인다.

삶에도 은은함이 있는 것처럼 냄새에도 은은함이 있다. 인간의 육감 중 뇌와 가장 가까운 감각은 후각이라고 한다. 생각해 보니 삶이 모든 기억들이 냄새였다. 젊음도 냄새였고 추억도 냄새였고 사랑도 냄새였다.

아들네 집을 방문해서 아침 산책하러 나간 적이 있다. 가로수가 길게 늘어선 길을 따라 걷는데 어디선가 달콤하면서도 깊숙한 냄새가 풍겨왔다. 아카시아 향기 같기도 하고 라임향 같기도 한 향기의 근원을 찾을 수 없었다. 남편과 나는 그 향내를 맡으며 공원을 향해 걸어갔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향기가 날 만한 꽃이 없었다. 냄새가 짙거나 꽃이 컸으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을 텐데 향기는 바람이 불면 사알짝 코끝을 건드려주는 정도였으니 궁금증만 더해갔다.

공원에서 산책하고 나오는 길에 공원 정원사가 장미를 손질하고 있었다. 정원사에게 물어보니 향기의 주인은 다름 아닌 린덴츄리, 보리수였다. 향기가 있는 꽃들은 대부분 잎에 비해 꽃이 작다. 잘잘한 꽃무더기가 잎에 가리워져 얼핏 보면 꽃이 보이지 않는 것들도 무수하다. 라일락이 그렇고 린덴츄리가 그렇고 아카시아가 그렇다. 향기 있는 것들은 조촐하다. 장미나 우뚝 선 해바라기와는 달리 수줍은 듯 나뭇잎에 가려져 작은 눈으로 세상을 본다. 은은한 향기로 말을 건다. 은은함은 직선보다 곡선이다. 보색(補色)보다 여색 대비(餘色對比)다. 음표라기보다 쉼표다. 세상 모든 작은 꽃들이여! 모퉁이에 서 있다 할지라도 향기가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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