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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철학자의 사람사는 이야기] <1> 동가숙 서가식(東家宿 西家食)에

Vancouver

2002.10.03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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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한국에서 들려 오는 수재민 소식은 고향을 멀리 떠나 있는 우리 모두에게 우울한 것으로 다가왔다.
누구 네는 집이 모두 무너져 내려앉았고 어느 마을은 마을 전체가 물에 쓸려 없어지기도 하였으며 또 다른 집은 가족 중의 누군가가 생존 여부를 알 수 없게 되었다는 소식 등등.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것은 너나 할 것 없이 쏟아 붓는 온정의 손길. 그것은 '나' 보다는 '우리'가 늘 앞설 수 있는 특이한 민족성 그 때문일 것이다.
나는 요즈음 이 낯선 땅 밴쿠버에서 또 다른 온정의 손길에 목이 메이고 눈물이 질금거려지는 그런 생활을 하고 있다.

9월 17일. 그 날은 딸애의 한 반 친구인 애나의 생일이었다.
생일 잔치는 그 주 토요일에 하기로 되어 있어서 특별한 이벤트는 없었지만 그래도 방과 후 딸애와 애나는 그냥 헤어지기가 섭섭해 학교 앞에서 여러 가지 놀이를 하며 놀고 그 애의 엄마와 나는 한껏 수다를 떨고 있었다.

따로 영어를 배우러 다닐 시간이 부족한 나에게 방과 후 딸애의 반 친구 엄마들과의 수다는 어디론가 영어를 배우러 다녀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해소시켜주는 하나의 방편이었다.
"역시 수다는 좋은 것이여. 그것이 영어든 한국어든" 하는 맘으로....
학교 앞에서 시간 반을 놀고 집 앞 32가 길목을 돌아서면서 우리는 요란한 함성을 터뜨리고 있는 소방차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나와는 무관한 것인 냥 무심코 지나쳐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뿔사! 그 소방차는 우리 집을 방문하던 중이었고 그러니까 불은 우리 집에서 난 것이었다.
놀라서 신발을 벗지도 못한 채 뛰어 올라간 일층 현관 앞에는 장정 같은 소방수들이 이미 불을 끈 채 돌아서고 있었다.
상황 끝.
무슨 연유로 불이 난 지조차 묻지도 못한 채 그저 How can I do? What should I do? 만을 연신 내뱉는 나에게 그저 숨이나 깊게 쉬라는 소방수의 말이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렸다.
사실 그 상황에서 "나 어떻게 해?"가 아닌 "How can I do?"를 아무리 외친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그 감정이 살아서 그들에게 전해질 리 만무했지만 그렇다고 아무 말도 안 할 수도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다행히 집은 많이 손상되지 않았고 그저 스토브와 전자 레인지만을 태운 채였지만 그을음과 재로 온 집안은 금방 숯껌뎅이처럼 되었고 당장의 잠자리와 끼니 걱정을 해야 했다.

벤쿠버에 온 지 일년 반이 되어 막 도착했을 때와 같은 서먹한 감정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라고 믿고 있었고 그래서 어느 정도는 구태의연하고 지루하기까지 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떤 큰 변화가 나에게 일어나길 바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작년 9월의 특별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제2의 9. 11 사건이 우리에게, 나에게 다시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조바심을 내기도 하였으니까.
어쨋든 사건은 나에게 일어났고 그날의 그 사건은 평온히 살아오던, 그래서 문득문득 심드렁하기까지 한 나의 삶을 갑작스레 변화시키기에 족했다.
하루하루 그날의 잠자리와 끼니 걱정, 더구나 어린 딸아이를 이끌고 이 집에서 하룻밤 신세 지고 저 집에서 한 끼니를 때워야 하는 이른바 동가숙 서가식은 너무나 속상한 일이었다.

어쩌다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는지, 다른 어떤 사람도 아닌 바로 나에게 그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하는 마음만이 사건 직후 내가 가졌던 오롯한 관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동가숙 서가식은 어느 새 그 동안 내가 살아왔던 삶을 돌이켜 보고 더 나은 삶의 방식을 찾는 큰 디딤돌이 되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늘 가던 길을 걷다 골목 귀퉁이를 지나면서 느닷없이 다가오는 낯설음과 새로움에 화들짝 놀라 호주머니 속의 손을 움켜쥐는 순간 그 안에 들어있던 사탕의 존재를 인식하는 어린아이처럼.
나는 늘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픈 바램과 그래야 한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액면 그대로는 정말 바람직하고 그럴듯한 바램처럼 보인다.
하지만 남에게 도움을 받는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는 나의 신조의 한켠에는 나라는 존재는 남의 도움이 없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자만심과 남의 도움을 받아서 살 수 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은근한 멸시와 조롱의 방자함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중요한 사항을 나는 내가 남의 도움을 받는 지경이 된 지금에야 깨닫는다.
또 아낌없이 잠자리를 제공해준
K선생이나 한국인은 가끔 한번씩은 빨간 것(매운 것)을 먹어줘야 한다며 이틀에 한번 꼴은 꼭 자기 집에 와서 식사를 하라는 Y선생님을 통해서, 그리고 자기 집이 넓지 않아서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얼굴을 붉히는 가난하지만 마음이 푸근한 캐나다 사람 애나 엄마와 지금 몸담고 있는 로라네 가족 그들 모두에게서 나는 사랑과 고통을 아낌없이 나눌 줄 아는 예쁜 마음을 배운다.

문화와 사고방식이 많이 다른 로라네 집에서의 생활이 무엇에 비할 데 없이 불편하고 힘들지만, 나에게 주어진 이 시련을 통해 진정으로 남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고자 한다.
남을 타고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 남과 늘 한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수련이 나에게는 좀 더 필요하다는 주문을 외우며...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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