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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광장] 정승이 죽으면 아무도 오지 않는다

Los Angeles

2017.05.2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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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택 규 / 국제타임스 편집위원
#. 오래전 어느 날, 하버드 대학교의 교내 '채플(Memorial Church)'에서 하나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거기에는 하버드의 교수 및 학생들뿐 아니라, 당시 정치인, 노벨상 학자 등 수많은 사회적 저명인사들이 참석을 하였다.

그때 그 학교에 유학 중이던 박대선 학생(추후 연세대학교 총장 역임)은 '어떤 유명한 사람이 죽었길래' 하는 호기심으로 잠깐 뒤쪽에서 참관해 보았다. 알고보니 그것은 그 학교에서 잡일을 하던 한 관리인의 장례식이었다.

샘으로 불리던 이 관리인은 10대 후반 나이에 이 학교에 청소부로 들어왔다. 그후, 여러 가지 잡일 및 경비 일을 하는 관리인이 되어, 거의 평생을 하버드 캠퍼스에서 보냈다.

그는 항상 명랑하고 유쾌한 얼굴로 일을 하였다. 학생이나 교수를 만나게 되면 뭐 자기가 도와줄 일이 없느냐'고 하며 친절히 대했다. 교수들의 심부름도 해주고, 학생들의 짐을 기숙사에 날라 주기도 하고, 신입생들에게는 학교 생활에 대한 안내를 해주기도 했다.

그는 항상 기쁘게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으며, 나이가 들면서는 학생들의 인생 상담자 역할도 했었다. 그날 그의 장례식에는, 그런 그를 기억하는 수많은 하버드 출신 저명인사들이 참석했던 것이다. (이상은 내가 박대선 총장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다)

#. 내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다. 어느날 나의 사무실에 토미라는 사람이 전화를 했다. 그는 영어로, 자기는 도라 김의 아들인데 "어머니가 오늘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 집례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도라 김이 누구인가? 얼마전 중앙일보가 특집으로 연재한 '미주한인 초기 이민사'에서 39~41호에 '딸들: 한인 이민자를 위한 안내자 김도라'라고 소개된, 바로 그 사람이다.

도라 김은 1921년, 철도 노동자의 딸로 태어난, 초기의 한인 2세다. 학교 졸업 후, 캘리포니아 주 고용국에 근무하면서, 새로 미국땅에 와, 인종차별과 언어문제로 고통당하는 한인들을 도와야겠다는 마음으로 1976년 '상항 한인봉사 센터(Korean Community Service Center)'를 설립하고 통역, 상담, 직업훈련 및 직장 알선, 자녀들의 입학, 병원 및 공공 기관 이용 안내, 청소년 선도, 노인 급식 프로그램, 등 한인들의 이민 정착을 도와주는 일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헌신, 봉사하였다.

1953년부터 80년대 초까지 약 30여 년간 샌프란시스코에 새로 온 한인 이민자, 유학생 중 도라 김의 도움과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 2005년 10월 15일, 사이프러스 공원묘지 채플에서 나는 그의 장례식을 집전하였다. 나는 그날 장례식에 수많은 조객들이 올 것을 기대했었다. 한데 그날 유가족들 외에 일반 조객은 10여 명 정도의 극히 적은 수만 참석했다.

우리 한국인들은 너무 빨리 받은 은혜를 망각하는 것일까. 혹은 한국 속담대로 "정승집 개가 죽으면 조객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작 정승이 죽으면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이기주의적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 많아서일까. 그렇지 않으면 도라 김이 은퇴후 한인사회와 관계를 끊고 살아서 사람들이 그를 잊어서인가.

그날, 도라 김의 그 쓸쓸했던 장례식을 마치고 나오면서, 나는, 앞으로 나의 장례식에는 과연 몇 사람이나 참석할까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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