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집찌끼미'다. 찌끼미는 집에 사는 능구렁이를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다, '찌끼미'라는 말에는 원래 '파수꾼' '수호신'이란 뜻이 담겨있다. 그렇다고 내가 우리 집을 사수하는 수호천사라는 말이 아니다. 솥바닥에 찰싹 붙은 누룽지처럼 집에 눌러앉아 요것조것 소소한 일상 즐기는 걸 좋아한다. 아무리 좋은 곳이나 여행을 가도 집 떠난 지 사흘이면 돌아갈 날만 학수고대해서 붙은 내 별칭이다.
그렇다고 내가 여행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여행 갈 날짜 잡아놓으면 미지의 세계에서 새롭게 만날 사람들과 색다른 풍물, 반복되는 일상의 굴레를 벗어나 낯선 곳에서 맞닥뜨릴 신비로움과 일탈의 호기심으로 가슴이 설렌다.
여자가 집 비울 동안 식구들 안 굶기려면 사전에 필사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우렁각시가 따로 없다. 우렁각시 설화는 노모와 사는 노총각에게 몰래 저녁을 만들어 바치던 우렁각시가 금기를 깨고 총각과 결혼하는 민간 설화다. 하늘에서 죄를 짓고 내려와 우렁이가 된 선녀와 노총각의 남녀 결연담은 갖은 난관과 고초, 역경을 딛고 해피엔딩에 이르게 된다. 각시를 잃어버린 총각이 슬픔에 젖어 파랑새가 됐다는 슬픈 결말도 있지만 오래 행복하게 살았다고 전해진다.
'남편과 싸우고 집 나가는 여자가 저녁 밥상 차려 놓고 간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 막상 집 떠날 날짜가 가까워져 오면 할 일이 너무 많아 '정말 이 고생 하며 여행을 가야 하나' 하는 의문이 생길 지경이다.
한국에 사는 한 후배는 여행 가려고 현관문 나오다 도로 들어가 남편 밥상에 구워둔 조기 살점 발라주고 나왔다고 툴툴거렸다. 그 남편은 손이 없나. 한데 지금 남의 남편 흉볼 때가 아니다. 집 떠나기 몇 주 전부터 남편에게 고별 편지 쓰듯 'To Do(해야 할 일)' 목록을 깨알같이 적어 냉장고와 남편 책상 출입구 등등 심지어 텔레비전 앞에도 주의사항을 붙인다. 말로 설명하면 잔소리 늘어놓는다고 콧방귀도 안 뀌어 고안해 낸 책략이다.
'취침 전에 앞문, 뒷문, 패티오 문 잠갔는지 확인하기. 잠들기 전 소등하고 개스 스토브 잠갔나 재확인할 것. 커튼과 블라인드는 해 지면 닫고 아침에 열기. 밤에는 넘어지지 않게 비상등 켜두기. 새벽에 하루 한 차례 창문 열고 3~4분 환기하기. 잠들기 전 소등, 부엌 점검하고 냉장고 문 눌러 닫을 것. 금붕어 밥 주기. 꽃밭과 채소밭에 매일 물주기.' 이 부분에서는 도저히 믿음이 안 가 궁여지책으로 매달아 둔 작은 화분 두 개는 매니저 집으로 시집 보냈다. 흙이 적게 든 작은 화분은 하루만 걸러도 오하이오 찜통더위에 끼루룩 시든다.
결과에 대한 과잉 기대는 금물! 이렇게 살뜰하게 적어 붙여놓는다고 다 지킬 양반도 아니다. 그래도 수행하지 않았을 경우, 나중에 싸울 때를 준비해 기록으로 남겨두는 게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다.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부인하며 들은 적 없다고 오리발 내밀고 멀쩡한 사람 거짓말쟁이로 만든 적이 한두 번이랴! 증거 불충분일 땐 목소리 크고 완강하게 부인하는 사람이 이기는 불행을 자초한다.
나는 돌아오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여행은 떠날 때 좋고 돌아올 때 더 좋다.
티격태격 정겨운 내 식구들과 벌리는 일상의 소음은 오래된 정원처럼 편안한 익숙함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