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키산맥 동쪽 면에 위치한 덴버는 중서부 최대의 도시로 1마일 높이에 있어서, Mile High City 라고 불리 운다.
콜로라도 주는 록키마운틴을 중심으로 지하자원이 풍부하여 예로부터, 금 또는 석탄 채굴 광산지역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일찍이 광산업이 발달하였으며, 광산학교가 있어서, 우리 나라 평안북도 운산 등지의 탄광지역에 광산자원 채굴 기자재를 보낸 것으로 나타나 있다.
자연스러이 미국 광산 기술자가 한국에 파견되었으며, 그런 연유로 한국의 광산 노동자들이 덴버로 이주하여 초기 한인사회를 형성하게 되기 시작하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
덴버 이민의 초석을 놓은 박희병(朴羲秉)은 1871년 강원도 철원에서 출생한 개화파의 한 사람이었다.
1884년 관립영어학교를 졸업하고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 게이오 대학에서 2년 동안 수학하고, 1886년에 고종임금이 가장 아끼고 후에는 의친왕으로 책봉한 이강 공과 함께 도미한다.
이강 공은 오하이오 주 웨슬리안 대학이 있는 델라웨어 시에서 2명의 수행원들과 2년 동안 머물렀으나, 박희병은 버지니아 주로 가서 로아노크(Roanoke) 대학에서 2년 동안 학업에 정진하였다.
그 대학은 1903년에는 김규식이 우등으로 졸업했으며 1908년에 서규병, , 1897년에는 서광범이 명예석사학위를 받는 등, 30여 명의 한인들이 수학하여 대한민국 독립운동과 역사적 관계가 있는 대학이다.
박희병은 1889년에 정부의 소환으로 귀국하여 외부 주사로 공직에 발을 들여놓아, 평안북도 운산 금광에서 통역관 겸 영미관계 통상 교섭관으로 일하게 된다.
박희병은 다시 선천지방에 신성학교를 설립하여 조카인 박용만을 교사로 채용하여 독립운동의 거점을 마련한다.
또한 운산 금광에서 많은 청년들을 모아서 광산업무에 대한 기초훈련을 시킨 후에 덴버지역의 탄광 노무자로 보내기도 했다.
조카 박용만에게는 선천지역의 갑부 아들인 정한경, 유일한, 이희경, 평양의 이정희, 이승만의 아들 이태선, 청주의 갑부 아들 이종철, 유은상, 정순만의 아들 정양필 등 8명을 대동하고 미국으로 가도록 주선하였다.
이 때에 정부의 부주의로 멕시코 유카탄 반도 어저귀 농장에 한국인들이 속아서 노예로 팔려가 짐승만도 못한 대접을 받고 산다는 소식이 멕시코에 인삼을 팔러갔다 온 사람들에 의해 전해지고, 중국계 신문인 문흥일보(文興日報)에 폭로되면서, 이들을 구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마침내 상동교회 청년부에서 미국 유학파인 박희병과 이범수를 선정하여 진상조사하기 위해 멕시코로 파견한다.
하지만, 중도에서 이범수는 신병으로 귀국했고, 박희병은 1906년 1월에 멕시코에 도착했지만, 동포들이 있는 유카탄 반도에는 무슨 이유인지 가지 못하고, 멕시코 시티에서 그만 발길을 돌린다.
박희병은 곧바로 1906년 1월 덴버로 와서 조카 박용만과 합류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인지, 이름도 박장현(朴章鉉)으로 바꾸고 조카와 함께 여관과 직업소개소를 운영하게 된다.
여관을 운영하면서 한국에서 온 동포들을 돌보고, 노동직업소개소를 운영하면서 본국에서 오는 사람들의 일자리를 주선해주며, 한인유학생들을 규합하여 한인경찰국도 만들었으며, 박용만, 윤병구 등과 함께 초기 한인사회의 조직을 이루어 나갔다고 볼 수 있다.
덴버에는 상당한 수의 한인들이 거주하며 조국의 국권회복운동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박희병은 때마침,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리는 덴버지역에서 북미대한인애국동지대표회를 개최하기로 준비하다가 애석하게도 1907년 6월13일 36세의 젊은 나이로 의문의 병사를 하고 만다.
박희병은 덴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5201 Brighton Blvd. Denver에 위치한 공동묘지(Riverside Cemetery)에 잠들어 있으며, 한때 서울에서 정동감리교회를 다녔으므로, 기독교대한감리교단 측에 의해 2001년 7월14일 "박희병 묘비"가 건립되었다.
박희병이 죽은 다음해 1908년에는 1월부터 조카인 박용만(임시의장)과 이관수(임시서기)를 중심으로 한인들이 모여 회의를 거듭하면서, 북미대한인애국동지대표회를 계속 준비하였다.
드디어 덴버 13가와 Bannock Ave. 에 있었던 그레이스 감리교회(4905E. Yale Ave.Denver)에서 박용만, 이관수, 이승만, 김용덕, 이명섭, 김성근, 윤병구, 김헌식 등 총 36명이 모여 7월11일부터 15일까지 5일 동안 8차례 북미대한인애국동지대표회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는 미주한인사회의 통합운동과 적극적인 독립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당시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의 통합론과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의 대통합론으로 확대되어 마침내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두고 거국내각 체제를 갖춘 국민회를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북미대한인애국동지대표회에서는 국권회복을 쟁취하는 방법에서 박용만의 군사력을 길러서 무력으로 국권을 회복하자는 안건과, 이승만의 외교를 통해서 국권을 회복해야한다는 의견, 그리고 안창호 계열의 동포 계몽과 개인 인격도야로 궁극적인 국권회복을 하자는 의견이 상충되었는데, 결국 박용만은 자기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네브라스카의 헤스팅스로 떠나고 만다.
선각자로서 국운을 다시 회복해 보려했던 애국운동가 박희병은 약관 36세의 나이로 덴버에서 병사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파란만장한 짧은 삶을 마감해야 했다.
하지만 그가 뿌려 놓은 씨앗은 이민역사 100여 년이 흐르는 콜로라도 주에 거주하는 3만여 한인동포들의 정신사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이런 훌륭한 이민 선조를 둔 덴버동포들의 과제는 사료를 발굴하여 체계 있게 정리하고, 기리는 일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프리메로(Primero) 탄광 등지에서 광산이 폭발하여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한인 이민 선조들의 영령들도 발굴하여 추모하는 일도 이민 후손들이 챙겨야 할 숙제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