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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그러면 죄 받는다

New York

2017.09.06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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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
우리는 보통 죄를 짓고, 벌을 받는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죄를 지으면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죄를 지을 때 그나마 두려움이 생겼다면 그건 아마도 벌을 받을 거라는 걱정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벌을 무겁게 주어야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라 이야기한다. 좀 더 끔찍한 벌을 고안하는 것도 같은 이유이리라. 사형제도에 찬성하는 사람도 같은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무거운 형벌에도 이 세상에 죄를 짓는 사람은 줄어들지 않는다. 이는 죄 짓는 것에 대한 해결책이 벌에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사형이나 무기징역이 늘어난다면 죄를 짓지 않을까? 어떤 범죄자는 이미 사형 받을 만한 죄를 지었기에 다른 범죄를 지으면서 두려움이 적었다고 한다. 오히려 사형이나 무기징역이 죄를 부르기도 한다. 죄를 짓는 데는 원인이 있다. 죄를 짓지 않게 하려면 그 원인을 해결해야지 벌을 주는 것만으로는 죄를 막을 수 없다. 배가 고파서 죄를 짓거나, 사람을 믿지 못해서 죄를 짓는 경우도 있다. 몸속에 분노가 가득하여 죄를 짓기도 한다. 가정의 온도가 파괴되어 죄를 막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벌이 무조건 해결책일 수 없다. 죄의 원인에는 가정과 사회와 국가가 있다. 물론 개인에게도 있겠지만 말이다.

죄를 짓는 사람은 벌 받는 것만 두려워할까? 어찌 보면 죄인은 벌이 두렵지는 않다. 어차피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죗값을 치러야 한다. 그래서 죄를 지은 이들은 벌을 달게 받겠다는 말을 하고 사람들은 그 말을 믿어준다. 물론 자신의 잘못은 생각 안 하고 억울해 하는 경우도 있다. 자신이 지은 죄보다 지나치게 무거운 형벌을 받는다면 억울할 수 있다. 또 비슷한 죄를 저질렀는데도 힘 있고 돈 많은 이들은 빠져나가고 나만 벌을 받는다면 정말 억울할 것이다. 분명 내가 잘못한 것은 맞지만 억울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벌을 받는 게 두렵다기보다는 억울한 것을 참을 수 없다. 나는 잘못을 저지른 이도 억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억울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죄를 제대로 씻을 수는 없다. 이는 벌을 주는 목적에 맞지 않는 일이다. 벌은 죄를 다시 짓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말에는 죄와 벌에 관한 흥미로운 표현이 있다. 바로 '죄 받다'라는 표현이다. 어릴 때부터 들어온 말인데 별 의심 없이 사용했다. 그런데 죄와 벌에 관해 생각하면서 표현의 특별함에 놀랐다. '벌 받다'라고 하지 않고, '죄 받다'라고 한 것이다. 물론 벌 받는다는 표현을 더 널리 쓴다. 하지만 죄 받는다는 표현도 함께 쓴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죄 받다'를 '벌 받다'의 의미와 비슷하게 설명하고 있다. 죄를 지어 이에 해당하는 벌을 받는다는 말이 줄어든 것으로 보는 듯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언어 표현은 있는 그대로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잘못을 하면 벌이 아니라 죄를 받을 수도 있다. 달리 말해 죄를 지은 이가 또 다른 죄를 짓게 될 거라는 경고라고 할 수 있다. 죄를 지었을 때 벌을 받는 게 두려운 일일까, 아니면 또 다른 죄를 짓는 게 두려운 일일까? 죄가 죄를 낳고, 어둠이 어둠을 낳고, 악이 악을 낳는다. 죄가 계속된다면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쁜 짓을 하고도 후회하지 않고,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벌을 받기도 하지만 점점 더 무서운 죄를 짓게 되기도 한다. 그야말로 죄를 받는 것이다. 처음에는 작은 죄로 시작하지만 점점 씻기 어려운 죄를 짓는다. 죄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 지은 죄를 씻으려 노력하지 않으면 죄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나는 죄를 받는다는 말을 무겁게 받아들인다. '너 그러면 죄 받아!'라고 말하던 어르신들의 엄중한 꾸지람이 마음 깊이 다가온다. 다른 죄까지 다시 받는 삶이어서는 안 된다. 지금의 죄를 마지막으로 죄 짓는 삶을 끊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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