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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흡 칼럼] 김옥균을 능지처참하라!

Atlanta

2017.09.28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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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3월 28일 오후 4시. 중국 상하이의 미국 조계지 철마로에 위치한 일본 호텔 동화양행. 김옥균은 2층 호텔 객실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의자에 반쯤 드러누워 <자치통감(資治通鑑)> 을 펴들었다. 홍종우는 일본 하인 오가사와라 소년을 심부름 내보낸 후 리볼버 권총을 꺼내 들었다. 그는 책을 읽고 있는 김옥균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첫 탄은 김옥균의 머리를 겨냥하고 발사했는데, 얼굴에 가서 박혔다. 김옥균이 놀라 일어서는 순간, 두 번째 총탄이 복부에, 비칠거리며 홍종우에게 다가서려는 순간 세 번째 총탄이 어깨를 관통했다. 김옥균은 바닥에 나뒹굴며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그의 나이 44세. 풍운아 김옥균은 10여 년 망명생활 끝에 상하이의 한 호텔 객실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홍종우는 김옥균을 암살한 후 상하이 교외로 달아나 한 농가에 숨었다가 다음날 거류지 경찰에 체포, 수감되었다. 홍종우는 중국 경찰에 체포될 때 “김옥균은 조선의 재상으로 대역부도한 사건에 연루되어 수 백명을 죽였다. 그는 일본으로 도피해 이름까지 바꿨다. 나는 김옥균을 죽여 왕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린 것이다. 이제 나라를 위해 그를 죽였으니 나는 죽어도 좋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다고 한다. 청국 정부는 범인을 인도해 달라는 일본 정부의 요청을 뿌리치고 홍종우를 김옥균의 시신과 함께 청국 군함에 태워 조선으로 보냈다.

4월 14일 밤 9시,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대교 북쪽 강변의 양화진 백사장에서 김옥균의 시신은 왕명에 의해 난도질을 당했다. 김옥균의 시신은 목과 손, 발을 자른 다음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손과 발 하나씩은 전국 팔도에 돌아가며 효시했다. 고종은 속이 시원하다 했고, 중전 민씨는 손뼉을 치며 축하의 연회를 베풀었다.

일본 정부는 조선 정부가 자객을 보내 김옥균을 암살하려는 움직임을 눈치 챘으나 이런 움직임을 저지하지는 않았다. 일본은 한 동안 김옥균을 지지했으나 갑신정변이 실패하여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1886년 망명객 김옥균을 도쿄에서 남쪽으로 1000㎞나 떨어진 태평양상의 오가사와라, 낙도 중의 낙도로 유배를 보냈다. 2년여 병마에 시달리던 김옥균은 2년 후 홋카이도 삿포로로 이송되었고, 얼마 후 도쿄로 돌아왔다.

조선 정부로서는 대역죄인을 그냥 놔둘 수 없다고 판단, 자객을 일본에 보내 호시탐탐 김옥균의 암살을 노렸다. 홍종우는 조선 정부가 보낸 자객에게 포섭되어 김옥균을 상하이로 유인, 암살에 성공한 것이다. 쓸모없는 인물이라면서 여기저기 유배를 보내는 등 내팽개치다시피 했던 일본 정부는 막상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암살당하자 그가 일본인이나 다름없고, 조계지 내의 일본 호텔에서 살해당했으니 사건 관할권이 일본에 있다면서 시신을 일본 정부에 돌려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일본 언론은 일제히 김옥균을 애도하고 의연금 모금, 시신 수습 문제를 협의하는 등 재빠르게 움직였다.

김옥균의 참혹한 형벌 소식을 접한 일본의 지도층과 언론은 조선과 청국을 응징하자는 여론을 형성하여 청일전쟁을 촉발시키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을사늑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장악하고 조선을 병합하는 절차를 추진하게 된다. 그 사이 김옥균은 또 다시 역사의 무덤에서 살아나온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김옥균은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충달(忠達)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역사는 이렇게 흘러간다. 충과 역도 이렇듯 허망하다. 조변석개하는 세상의 인심 속을 살면서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는 꿈을 꾼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를 실감한다. 도쿄 아오야마 묘지의 외국인 묘역 한가운데 자리 잡은 김옥균의 묘 앞을 지키고 있는 묘비석은 개화당 유길준이 쓴 것인데, 그 비명의 첫 구절은 다음과 같다.

“비상한 재주를 갖고, 비상한 시대를 만나, 비상한 공도 세우지 못하고, 비상하게 죽어간, 하늘나라의 김옥균 공이여!”

어리석은 나라는 분노하기 위해, 현명한 나라는 강해지기 위해 역사를 이용한다. 우리는 어느 쪽일까. 신숙주는 전란 이전 일본의 실체를 알았던 조선의 극소수 지식인이었다. 일본에 사신으로 간 경험이 그의 인식을 바꾸었다. <혼일강리도> 제작 70여년 후였다. 돌아와 일본의 실체를 알리는 <해동제국기> 를 썼다. 훗날 류성룡은 전란의 교훈을 담은 <징비록> 서문에 신숙주가 임금 성종에게 남긴 유언을 적었다. “바라건대 우리나라는 일본과 화의하기를 잃지 마소서.” 조선은 관심이 없었다. 대다수는 왜 그런 유언을 남겼는지도 몰랐다. 일을 당하고야 뜻을 알았다.

우리 역사에서 일본을 중요시한 지식인의 말로는 비참했다. 조선 말 일본 근대화를 현장에서 목격한 젊은 엘리트 다수가 정치적 소용돌이에 말려 목숨을 잃었다. 개혁과 정변을 시도했다가 목이 잘리고 백성에게 맞아 죽은 이도 많았다. 일제강점기 이후 ‘지일(知日)’은 일제에 기생하는 ‘친일’과 같은 뜻이 됐고, 해방 후 이 말은 ‘사회적 매장’과 동의어가 됐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런 금기에 다가가 역사를 객관화하는 모험은 지뢰밭에 스스로 몸을 던지는 무모함과 비슷하다. 그럴수록 우리 인식이 일본의 실체로부터 멀어지는 걸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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