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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칼럼] 내 나이 육십하고 하나일 때

Atlanta

2017.10.01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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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스클럽에서 수영하다가 잠시 쉬는 중이었다. 의자에 기대앉아 무심히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풀장 저편 구석에서 한 여자가 앞가슴에 손을 모으고 물속에서 펄쩍펄쩍 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나! 직감으로 비키니 수영복 끈이 풀어져서 윗부분이 물속에 빠진 거라는 생각이 들어 후다닥 일어났다. 우선 그녀의 노출된 가슴부터 가려 주어야겠다는 급한 마음에 내가 치마처럼 두르고 있던 수건을 풀어 손에 쥐고는 그쪽을 향해 재빠르게 걸어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가까이 가보니 물속에서 뛰고 있던 사람은 놀랍게도 중년 남자였다. 어떻게 남자가 여자처럼 파마했냐며 흉을 보거나, 남자의 가슴이 어쩌면 그렇게 여자 같냐고 웃을 새도 없이, 내가 안경을 안 썼다는 걸 깨닫는 순간의 낭패감이라니.
내가 안경을 처음 써본 것은 여고생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나나 무스쿠리’라는 여가수의 노래에 심취해 있었는데, 그가 쓴 검은 뿔테 안경이 쓰고 싶어서 안달했었다. 그러나 당시 내 시력이 2.0이었으니 안경을 사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화신백화점의 천보당 안경점에서 일하는 사람이 우리 집 아랫방에 세 들어 온 것이었다. 얼마 후부터 나는 칠판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아서 학교에서 공부가 안된다고 엄마에게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고, 결국 엄마는 천보당에 가서 안경을 맞춰 주었다. 물론, 안경사인 오빠와 내가 사전에 공모했다는 사실을 엄마는 전혀 몰랐으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처음 써 보았던 도수 없는 안경이 시초였는지 모르지만, 결국 내 눈은 난시가 되었다. 이제는 노안까지 겹치다 보니, 안경 없이는 일상을 편하게 해 나갈 수 없다. 맨눈으로 책을 보면 활자들은 거무스름한 줄로 보이고, 겹쳐 보이는 사물에 초점을 맞추려면 늘 미간을 찡그리게 된다. 그뿐이 아니다. 반갑게 다가오는 지인을 너무 데면데면하게 쳐다보는 바람에 건방지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고, 못 본 체 인사도 없이 지나치는 내 모습에 배신감까지 느꼈었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나이는 못 속이는 거라고 스스로 위로하다가도, 노화 현상이 복병처럼 가끔 한 번씩 내 마음을 툭툭 칠 때면, 별 의미 없이 받아들이던 일에서도 괜스레 주눅이 든다.

초점을 못 맞추는 시력을 통해서 내가 늙었다는 것을 실감하고 보니, 왠지 마음이 서늘해진다. 그동안 혹사당했던 내 몸을 지금부터라도 다둑이지 않으면 어디서 언제 쿠데타를 일으킬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걱정도 생긴다. 생각해 보니 지금껏 사는 동안 나이를 의식하며 산적이 거의 없다. 아니, 어쩌면 몸은 계속 늙어 갔는데 의식적으로 늙음을 인정하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세어버린 머리칼을 검게 물들이고, 젊은 시절 청바지를 다시 꺼내입고, 화장으로 피부를 가꾸면서 아등바등 매달렸던 기억들이 오늘은 왜 추레하게 느껴질까.

흔히들 마음에도 눈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신체의 눈은 육안이고, 마음의 눈은 심안이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추구하고, 손에 잡히는 무엇인가를 이루려 사는 것이 ‘젊음’이라면, ‘늙음’이란 마음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나이 드는 것은 아닐는지.

가수 이장희가 불렀던 노래 중에 ‘내 나이 육십하고 하나일 때’라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 마지막 부분은 이런 내용이다. ‘내 나이 육십하고 하나일 때 / 난 그땐 어떤 사람일까 / 그때도 사랑하는 건 나의 아내 / 내 아내뿐일까 / 그때도 울을 수 있고 / 가슴 속엔 꿈이 남아 있을까.’

부양했던 부모님도 떠나고, 장성한 자식들도 사라져 버린 외로운 공백이 두렵다면, 각종 모임에 참석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친구들과 전화를 하고 일주일에 몇 번씩 쇼핑을 다녀도 혼자 있을 때 울적하고 허전하다면, 하루에 한 번, 십분 만이라도 눈을 감고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면 어떨까. 그럴 수만 있다면 가슴 속에 남아있는 꿈은 없더라도, 내 나이 육십하고 하나일 때,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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