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끝내고 여행 가방을 펼치면 여행 증명이 가득 들어있다. 유명한 장소에서 친절하게 찍어준 확인 스탬프, 현지 사람들이 정성으로 만든 토산품, 사진기에 담아 놓은 풍광, 그 곳의 상징 앞에 자기를 세워 놓고 찍은 증명사진이 줄을 잇는다. 흘러 다니며 만나고 헤어진 많은 사람들과의 이야기 보따리도 돌아와 앉은 여행자의 마음 속에 가득하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보는, 지나온 길 위에 남은 자신의 흔적을 흐뭇해 한다.
누구를 만났는가. 어디를 다녀 왔는가. 어떤 일을 했는가. 들어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채워주듯 지금은 누구나 들고 다니는 전화기 속의 사진기 성능이 너무 좋아 언제 어디든지 사진으로 남겨 원하는 만큼 증명해 보일 수 있다. 사방에서 "인증 샷" 찍는 소리가 들려 온다. 보다 더 유명한 사람을 만나고 모든 이들이 가보고 싶어하는 곳에 서 보았고 세상에 신기하고 특별한 것을 만나면 사람들은 더욱 더 그런 자기를 증명해 보이고자 열심히 증거 자료를 만들어 낸다.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장소나 다리 위에는 수많은 자물쇠들이 열쇠 없이 채워진 채로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너하고 나의 그 귀한 감정을 확인하려는 두 사람의 염원이다. 산 허리 바위 위에 새겨진 이름은 자기를 보여주고 싶은 또 하나의 표현이다. 관광지 건축물의 어느 구석에 남아있는 이름과 글귀는 왔다 갔음을 확인 받는 영수증 같다. 그다지 개발되지 않은 여행지에서 구해 보내는 조잡한 인쇄의 그림 엽서는 확실한 여행 증명의 효과가 있다. 발자국만 남기고 사진만 가져가 달라는 부탁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곳의 돌 조각 하나라도 챙겨오는 것은 자기의 다녀 온 행적을 확인 받으려는 심정 때문이다. 돌아와 만지작거리며 자신의 숨결을 거기에 실어보면서.
한국을 떠나 올 때 가져 온 그 때의 화폐나 그 시절의 작은 물품을 소중하게 보관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떠나 왔으나 살던 그곳의 냄새를 잊고 싶지 않음이다. 거쳐온 나의 발자취와 더불어 오래 간직하려는 마음이다. 여행에서 집어 드는 기념품과는 또 다른 모양의 기념품이고 삶의 증명이되는 것들이다. 어쩌다 서랍 속에서 딸랑 거리다 떨어지는 "오백환" 동전 하나가 고향 어느 거리를 생각하며 미소 짓게 한다. 혹은 소식 모르는 어느 친구의 얼굴과 교차되기도 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는 무엇을 그곳에 남겨 놓고 왔을까. 어디에 나의 발자국이 남아 있을까.
만난 사람과의 깊이 있는 교류나 눈 앞의 경치와 건축의 참 맛을 경험하는 것 보다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보고 왔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급급한 사진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증 사진보다 진짜 훌륭한 경험의 내용이 더 가치가 있음을 사람들은 알고 있지만 잊어버리는 때가 참 많다. 사진 기록 장치가 없으면 좀 더 깊이 있는 경험을 만들어내고자 노력하게 되지 않을까 라는 한가한 생각을 해 본다. 예전에는 뜻 맞는 사람을 만나면 시 한 수 주고 받거나 놀라운 장관 앞에서는 그것을 마음 속에 담기 위하여 온 종일 가슴 떨며 앉아 있기도 하고 돌 기둥 하나도 오랜 시간 돌아보고 바라보고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돌아와 친구에게 그 감동을 끝없이 전해 줄 수도 있었다는데 지금 전자기기 속에 사진 한 장 딸깍 보여주고 신 나게 웃고 마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게가 없고 가벼워진 세태만큼 너무 가벼워 보인다.
많은 이야기가 길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길을 끝낸 후에 길 위에서 엮어진 재미있고 즐겁고 슬프고 기쁘고 신기한 일들을 기억하고 그 소중한 시간들을 되살려 낸다. 그것들은 모여서 모험담이 되고 신화가 되고 역사가 되어 다시 길 떠나는 자에게 들려진다. 여행하는 사람의 심정이 되어들려지는 그 이야기에 무엇이 남고 무엇이 사라졌는지 들여다 본다. 여행이 끝나 갈 때 돌아보아 가치를 지닌 발자국이 지나 온 길 위에 남아있고 여행 가방 속에는 버릴 것 없는 증명 언어가 가득하다면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