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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있는 창가]파자소암(婆子燒庵)노파가 암자를 불태우다

Vancouver

2006.05.14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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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현섭, 수필가


사람의 생존본능에는 육신을 지탱해 나가기 위해 강한 식욕을 가지고 있다. 먹어야 산다는 것은 누가 가르쳐주어서 아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정신적으로는 자신을 남으로부터 인정받고, 남으로부터 사랑 받으려는 욕구로 생래적인 본능이다.

겸손은 고래로부터의 미덕이나 사실 자신을 낮추려는 마음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강조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자존심을 최대한 살려주면 그 사람의 목숨마저도 빼앗을 수 있다. 스스로를 높이고 주위로부터 인정받으려는 마음은 일종의 정신적 생존본능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이 자존심이 남과의 관계에서 숱한 역작용을 일으킴으로써 화의 원인이 되고 불행의 씨앗이 되기 때문에 성현들은 한결같이 하심(下心)을 가지고 겸손 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속에는 천사와 악마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 천사와 악마라는 개념은 서구 기독교사상에서 나타나는 것인데 둘 중에 하나는 나쁘다는 것이다. 동양사상에서는 어떤 것이 나쁘고 좋다는 개념이 없다. -

세상에 순응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살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때로는 자존심을 상해서 기분이 상하고, 화가 나고, 그래서 남에게 강한 말을 하게 된다. 이런 두 가지 마음이 충돌을 일으킬 때 마음이 혼란스러워지고 고통을 맛보게 되며 평화가 깨지고 만다.

사람에게 자신을 높이려는 마음은 없고 하심만 있다면 왜 겸손 하라고 강조하겠는가.
사람에게 욕심이 없고 항상 맑은 마음이라면 왜 마음을 비우라고 하겠는가.

사람에게 태만함이 없고 늘 부지런하기만 하다면 왜 매사에 정성을 다하고 정진하라는 말이 있겠는가. 이는 우리 마음속에 두 가지 대립되는 마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옛날에 불도를 닦는 스님 한 사람에게 암자를 지어주고 오랜 세월을 공양한 노파가 있었다.

20년이 지나서 이제 스님의 도가 완성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하고 젊은 딸을 들여보내 시험해 보기로 하였다. 방에 들어온 딸이 난데없이 스님에게 안기면서 “바로 이런 때에는 심경이 어떠합니까?”하고 물었다. 스님은 미동도 하지 않고 “고목(枯木)이 의한암(倚寒巖)하니 삼동(三冬)에 무난기(無暖氣)로다. -고목이 찬 바위에 의지해 있으니, 겨울날 따스한 기운이라고는 찾을 수 없다- ”고 응답하였다.

방에서 나온 딸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은 노파는 노발대발 화를 내며 이십년 공양이 허사가 되었다고 하면서 스님을 내쫓고 암자를 불 질러 태워버렸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유명한 불교 공안(公案 - 화두) 중에 하나인데 노파가 암자를 불태운 이유를 깊이 사유하라는 뜻이다. ‘애욕이 나쁘다는 전제로 애욕을 없애면 되겠는가. 욕망이 나쁘다는 전제로 욕망을 전연 느낄 수조차 없으면 되겠는가. 악은 나쁘니까 모두 없애버리면 과연 선만 남는 것인가.’에 관한 철학적 명상을 요구하고 있다.

불교학자 이원섭은 그의 저서 <깨침의 미학> 에서 이 점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불순물이 섞인 구체적인 물을 떠나 순수한 물을 찾을 수 없듯, 번뇌와 관계없는 어딘가에 깨달음이 있는 것은 아닌 까닭이니, 애욕은 그 불순성을 정화하면 될 뿐이지 죽여 없애선 안 된다. 만일 애욕을 죽일 때는 그 모체인 자비까지도 죽이는 결과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는 일찍이 연기(緣起)의 법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이것을 없이하면 저것이 없고, 저것을 없이하면 이것이 없다.’ 우주만물의 생존이 서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상호 존재의 전제가 되고 있다는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덴마크의 유명한 양자물리학자 닐스 보어는 “진리는 그 반대의 경우에도 진리일 때만이 진리이다.”고 갈파하였다. 우리가 양면성을 가진 두 가지 진리 중에 한 가지를 매도하고. 다른 한 가지만을 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상자 속을 무엇으로 채우고, 다시 비우고 그리고 다시 채웠다고 하자. 이런 상태를 계속한다면 과연 이 상자는 빈 상자라 해야 하나, 찬 상자라 해야 할 것인가. 상자 속이 비어 있었기 때문에 채울 수 있었으며, 차 있었기 때문에 비울 수 있었다. 두 상태는 상호 의존적인 존재상태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나가 없으면 다른 것이 존재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또한 비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상자의 상태를 인간은 사유해 낼 수 없다. 다만 상자 자체가 소멸하면 빈 상자도 찬 상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세상(위에서 말한 상자와 같다)을 떠나서는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가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싫은 것도 있고 좋은 것도 있는, 아름다운 것도 있고 추한 것도 있는,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는 이 세상에서만이 진리가 있다. 진리의 상대성으로 말한다면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아름답지 않은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성립되는 말이다. 따라서 아름답지 않은 모든 것을 없이 하면 아름다운 것만 남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다는 개념으로 존재하지 못하게 되므로 아름다운 것마저 소멸하는 것이다.

위로는 하늘이 있고 아래로는 땅이 있기에 사람이 있고,
사람과 사람이 있기에 그 사이에 인간(人間)이 있다.

캐나다 밴쿠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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