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사연 칼럼] 예수와 유다 그리고 함석헌①
예수는 과연 정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을까? 그의 의중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예수는 로마 식민통치로부터 무력과 유혈을 동원해서라도 이스라엘의 독립을 계획하는 과격한 유대인 민족진영으로부터 점차 이스라엘 민족을 독립시킬 민족지도자, 잠재적 메시아로 열렬한 주목과 기대를 받았다. 그런 면에서 친로마파인 기득권층의 유대인과 로마 식민주의 정권에서 예수를 경계하고, 그의 언행으로부터 권력 도전, 체제 전복의 위협을 느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그러므로, 당시 예수의 언행은 종교인으로서는 ‘너무 정치에 간섭하는 듯한’ 인상을 풍겼고, 반면 사회혁명가, 잠재적 정치인으로서는 ‘너무 종교적’인 냄새를 풍겼다고 볼 수가 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와 유다 사이의 관계를 재조명해 봄으로써, 예수가 과연 순수한 종교사상가였는지, 아니면 사회참여를 부르짖는 정치적 행동가였는지의 여부를 더 뚜렷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성서역사가들은 유다가 로마 식민정권에 무력으로 대항하는 유대인 독립운동단체인 열심당(Zealots)의 열광적인 회원이었거나, 최소한 이들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추정한다. 열심당은 일제강점기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독립군이나 광복군과 비슷한 단체다. 한국의 광복군과 좀 다른 점이 있다면, 열심당원들은 유대인으로서의 민족애 외에 로마 식민정권에 저항하여 무력투쟁을 하는 독립운동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역사(役事)할 것으로 믿었다는 것이다. 즉, 유대인 민족주의에 유대교의 종교신앙이 함께 합쳐진 과격한 정치, 종교적 지하조직이 열심당이다.
유다는 과격한 행동주의자였고, 비폭력을 주장하는 예수와는 달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의한 로마 정권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독립시키려는 야심에 차 있었다. 비록 유다만이 예수의 열두 제자 중 오직 갈릴리인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가 유다를 회계로 임명한 것이 시선을 끈다. 이것을 1970년대 한국적 상황으로 풀이하면, 재야 조직원 중에서 오직 유다만이 유일하게 호남인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호남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은 단체에서 중책을 맡은 것으로 비교할 수 있다. 어느 시대 어느 집단을 막론하고 돈 관리의 책임을 맡은 사람은 그 집단으로부터 신뢰와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이다. 다른 말로 인간은 믿을 수 없는 얼렁뚱땅한 아무 사람한테나 자기들의 돈을 맡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만약 회계직이 유다에게 금전적 욕구를 불러일으킬 유혹이 된다고 생각했다면, 전지전능한 예수는 그를 돈을 관리하는 자리에 임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유다 자신도 돈 몇 푼 훔치는 데 관심이 있는 좀도둑 근성이 있었다면 물질적으로 가난한 전도자인 예수를 쫓아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의 착취로부터 식민지 이스라엘의 빈곤과 사회문제에 대해 의식이 예민한 유다는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었을 때 당당하고 거침없이 스승 예수를 비판하기도 했다. “왜 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소?”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추정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유다가 예수의 뒤를 따라다닌 동기는 종교적 동기나 금전적 동기가 아니라, 민족주의자적인 동기와 사회, 정치적 동기라는 것이다.
김성수/『함석헌 평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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