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 노래인생 40년-’을 맞아 요즘 한국가요계가 떠들석하다.
신문방송등 언론매체마다 ‘조용필 노래 40년’ 특집준비에 한창이다.
한국 대중음악계에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전설’ 조용필은 이제 한발 물러설만도 한데 갈수록 ‘강한 현역’을 과시하고 있다.
오는 4월말부터 서울 올림픽주경기장을 시작으로 , 월드컵경기장 종합운동장을 포함해 50회 공연이 예정돼 있다.
그중에는 70~80억원이 소요되는 35층(약 70m) 빌딩높이의 무대도 계획돼 있다.
매 공연마다 100명이 넘는 보조출연자가 동행한다.
본지가 올해, 콜로라도 ‘레드락’ 무대에서 조용필 초청공연을 시도했으나 1회 30만불이 넘는 엄청난 비용 때문에 끝내 무산됐다.
LA나 뉴욕같은 큰 한인커뮤니티가 아니고선 미주한인사회 어느곳에서도 조용필공연은 어려울 전망이다.
도대체 어떤 숨은 힘이 조용필을 이처럼 끝없이 밀어올리는 것일까? 그가 우리시대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이며,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과연 어떤 것들인가? ‘가왕’(歌王)의 걸음걸음에 찍힌 발자욱들중 그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은 뒷얘기들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조용필 노래 40년…’가왕(歌王)’이 흩뿌린 편린(片鱗)들-(상)
뺨맞으며 노래…’고집불통 땜빵가수’
‘못찾겠다 꾀꼬리’ ‘창밖의 여자’ ‘비련’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1984년초 조용필에게 물었다.
“지금 국내 가수중 라이벌이 있나면 누구냐?”고. 그의 대답은 놀랍게도 당대 최고인기가수 이미자나 나훈아가 아닌, 타계한지 20년도 넘은 남인수였다.
남인수(1918~1962. 본명 강문수)-. 실로 위대한 가수다.
‘애수의 소야곡’ ‘무정천리’ ‘이별의 부산정거장’ ‘황성옛터’ ‘감격시대’등 주옥같은 불멸의 대중가요 수십편을 남겼다.
8.15해방과 6.25전쟁의 극심한 빈곤과 혼란기에 특유의 센티멘탈리즘으로 온국민의 가슴속을 깊이깊이 파고들었다.
남인수처럼 많은 사람의 몸속에 깊이 스며든 가수는 아직없었고 과연 자기가 평생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안선다는게 당시 조용필의 답변이었다.
지금 그에게 “국내 가수중 라이벌이 있다면 누구냐”고 다시 묻는다면 과연 아직도 “남인수”라고 대답할 것인가?
‘조용필 노래인생 40년-’을 맞아 요즘 한국가요계가 떠들석하다.
신문 방송등 언론매체마다 ‘조용필 노래 40년’특집준비에 한창이다.
그만큼 그가 한국 대중가요사에 그은 획은 굵고 찐하다.
어느새 그의 이름석자 앞엔 ‘가왕(歌王)’ 이란 타이틀이 붙었다.
그를 ‘가왕’으로 밀어올린 힘의 원천은 과연 무엇인가? 소질인가, 노력인가, 아니면 운명인가? ‘가왕’이 흩뿌린 ‘편린(片鱗)’들을 더듬어 보자.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네”
1950년생. 올해나이 58세-. 19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으나 대마초에 그만 걸렸다.
‘돌아와요~’는 1974~5년 무명 땜방가수(극장쇼무대에서 인기가수 지각출연시 시간때우기 가수)시절 그가 부른 노래였다.
이즈음 일화 한토막-. 부산 코모도호텔 나이트클럽에서 대기중 클럽 연예부장으로부터 땜방가수 조용필이 급히 불려올라 갔다.
연예부장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인기가수 대신 그의 노래 ‘바다가 육지라면’을 부를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조용필은 “내 노래를 부르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험상궂은 연예부장은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인기가수 노래를 부를 것을 눈을 부릅뜨고 거듭 명령했다.
하지만 조용필은 “나는 내 노래가 있다”며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시덥잖은 말재간으로 가수가 등장하기만을 기다리며 시간을 끌던 MC는 농담 소재가 떨어지자 안절부절, 연신 무대옆 가수대기석 쪽에 눈짓신호로 땜방가수가 빨리 나오라는 사인을 보냈고, 이때 참다못한 연예부장의 주먹이 조용필의 왼쪽 뺨으로 날아들었다.
”이 XX가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누구 장사 망치려고 지 노래를 불러? 여기가 촌동네 노래자랑 가설무대인줄 아느냐?”며 두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조용필은 “화 풀릴때까지 날 때려라. 난 내노래를 불러야 한다”며 오히려 오른쪽 뺨을 내밀었고, 연예부장의 주먹은 오른뺨 왼뺨으로 거칠게 날아들었다.
그래도 고집을 굽히지 않자 시간 끌기를 버티다 못한 연예부장은 “네 맘대로 해! 이 XX야” 하며 조용필을 무대로 밀어올렸다.
이때 기타를 치며 부른 노래가 ‘돌아와요 부산항에’다.
창밖의 여자-첫부인 박지숙
대마초로 묶였던 1970년대 후반, 서울로 올라온 조용필은 동대문 이스턴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역시 땜방가수로 간간히 무대에 섰다.
그 즈음 묘령의 아가씨가 조용필 곁에 다가왔다.
충남공주 3선 국회의원 박찬씨의 따님이자 조용필의 첫번째 부인인 박지숙이었다.
현대차 포니2를 손수 몰고 주말마다 공주에서 서울로 올라온 미모의 여대생 박지숙과 조용필은 곧 연인사이로 발전했다.
그러나 3선의 야당 중진의원 따님과 무명가수의 사랑은 애초부터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어느날 박지숙을 만나러 공주로 내려간 조용필은 고래등같은 한옥 박의원의 집 담장을 넘어 지숙의 방앞에까지 다가갔다가 박의원으로 부터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기다렸다는듯 박의원은 조용필의 멱살을 잡고 대문밖으로 끌고나가 온동네 사람들을 향해 “도둑놈 잡았다!”고 외쳤다.
이쯤 망신을 주면 둘 사이가 갈라질 것으로 생각했던 것.
그날 밤, 조용필은 친구 하숙방을 찾아가 구멍가게에서 산 4홉들이 소주 2병을 안주없이 단숨에 들이켰다.
뱃속이 온전할 리 없었다.
하숙방 낮은 창문을 열고 토하기 시작했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 상태였다.
토하다 토하다 언뜻 고개를 들었을 때, 앗! 창밖에서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박지숙이 조용필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너무도 반갑고 너무도 놀라워 두 눈을 비비고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을 때 박지숙은 온데간데 없었다.
비몽사몽간에 조용필은 오선지를 꺼내 곡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차라리~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 토하듯, 절규하듯 부르는 그 유명한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는 그날 밤,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
조용필 노래 40년…’가왕(歌王)’이 흩뿌린 편린(片鱗)들-(중)
‘사형수’김지하,’실세’허문도…왜?
“한(恨)은 생명이요…”
1980년, 대마초에서 풀리면서 민요 ‘한오백년’으로 재기에 나선 조용필은 곧이어 ‘창밖의 여자’로 단숨에 톱가수 반열에 오른다.
이즈음 쌍용그룹이 건설한 용평스키장이 개장됐다.
쌍용 김석원회장은 시인 김지하를 비롯,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등 당시 최고인기 가수들과 함께 조용필을 개관식에 초대했다.
박정희로부터 사약(사형선고)을 받았다가 감옥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저절로 배웠다는 반독재 선봉 김지하와 조용필과의 첫 만남-.
그날 밤 사단이 벌어졌다.
술에 취한 김지하시인이 돌연 “김석원이 이놈 어디로 도망갔어? 빨리 나오라고 해!”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김시인은 멋쩍은 표정의 김회장에게 “천하의 김지하와 조용필을 불러놓고 술이 이게 뭐야? 용평에 있는 술 다 가져와”라며 소리쳤다.
이날 밤 김지하와 조용필은 스키장 눈밭을 얼싸안고 딩굴며 밤새도록 유쾌하게 술을 퍼마셔댔다.
며칠후 조용필은 천주교 원주교구 한구석 방한칸을 빌어 살고있는 김지하를 찾아가 물었다.
”형님, ‘한오백년’ ‘창밖의 여자’를 들은 사람들이 제 목소리에 한(恨)이 서려있다고들 하는데…, 도대체 한이 뭐예요?”
”음…한은 생명이야!”
”네-에? 그럼 생명은 또 뭐예요?”
”생명은 음…리듬이야!”
”‘한’은 ‘생명’이요, ‘생명’은 ‘리듬’이다? 하아-????”
대중들에게 크게 어필하지는 않았지만 조용필이 지금도 가장 아끼는 노래 ‘생명’은 여기서 태어났다.
갓난 아기의 울음소리로 시작해 나레이션과 함께 노래로 이어지는 ‘생명’은 2005년 조용필의 평양공연에서 주요곡으로 불리워졌고,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이란 그의 반주팀 이름도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첫 결혼에서 실패한 진짜이유
1984년 조용필은 박지숙과 우여곡절 끝에 경기도 봉선사 절에서 비밀결혼식을 올렸지만 그의 첫 결혼생활은 순탄치가 않았다.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여의도 방송국 일을 마치고 강남 서초동 집으로 돌아갈 때 강물에 비춰 흔들리는 가로등 불기둥을 보는 순간 조용필은 얼핏 영감을 얻는다.
음을 귀로 듣는 것이 아니고 눈으로 보는 것, 소위 ‘절대음감’이다.
소리를 눈으로 본 순간 조용필은 곧장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잠그고 작곡에 몰두한다.
꼬박 하루가 지나고 이튿날이 다가올 무렵 남편걱정에 애태우던 아내 박지숙은 ‘절대 방해금지’ 약속을 어기고 커피와 갓 구운 토스트를 쟁반에 받쳐들고는 남편 방의 문을 두드린다.
‘똑똑똑-똑똑똑-’ 노크가 두 세차례 이어지는 순간 방문이 벌컥 열리며 분노에 이글거리는 눈초리의 조용필이 뛰쳐나와 커피와 토스트가 담긴 쟁반을 엎어버린다.
”당신 땜에 다 된 작곡 헝클어져 버렸잖아-에이 썅-”
2년 남짓 조용필의 첫 결혼생활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천재 음악인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던 평범한 아내 박지숙은 그 후 홀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LA 라하레아 근처에서 조그마한 카페를 운영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지금은 소식이 끊긴 상태다.
“전쟁터지면 조용필이 꼭 필요”
1985년 어느날 서울 강남의 한 룸카페. 조용필과 신문사 가요담당 기자 서너명이 모였다.
곧 발표할 예정인 ‘허공’을 한번 들어보라고 부른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조용필은 자신의 기타반주로 ‘허공’뿐 아니라 수십곡을 부르고 또 불렀다.
이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체구가 건장한 50대중반의 사내가 뛰어들어 조용필의 노래에 맞춰 마구 몸을 흔들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장내가 싸늘해졌다.
자세히 보니 건장한 체구의 그 사내는 당시 날으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허문도 통일원장관이었다.
조용필의 노래가 중단되자 허장관은 기자들에게 사뭇 엄숙한 어조로 꾸짖듯 일갈했다.
”조용필군은 서너명 즐기라고 목소리를 낭비해선 안됩니다.
수천,수만의 관중이 모인 장소라도 아껴서 불러야 합니다.
만약 한국에서 전쟁이 나면 10명의 가수보다 조용필 한명이 필요합니다.
조군의 목소리엔 우리 민족을 한 곳으로 끌어모으는 힘이 있기 때문에 서너개 사단병력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조군의 목소리를 아껴줘야 하는 이유입니다.
”
전두환 정권이 노태우에게로 넘어갈 무렵, 88서울 올림픽이 열렸다.
주변에선 물론 조용필도 올림픽 공식주제곡은 자신이 부를줄 알았다.
역대 올림픽사상 가장 성공한 공식주제곡은 1964 동경올림픽 때 나온 ‘블루라이트 요코하마’였다.
‘이시다 아유미’란 앳된 목소리의 여가수가 남녀간의 사랑을 주제로 부른 이 노래는 당시 일본인의 정서를 가장 잘 담아냈다는 평과 함께, 그 해 빌보드 차트에 톱으로 랭크될 정도로 전 세계인의 큰 호응을 얻었다.
한국민의 정서를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가수는 의심의 여지없이 조용필이었다.
하지만 올림픽조직위원회는 “국제감각이 필요하다”며 공식주제가 취입을 미국에서 활동하던 4인조 가족그룹 ‘코리아나’에게 맡겼고 ‘손에 손 잡고’가 나왔다.
조용필은 울고 또 울었다.
울다가 지친 그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는 “그렇다면 올림픽 폐막곡만이라도 부르겠다”며 급히 노래를 만들었다.
‘해질무렵 거리에 나가 차를 마시면~’으로 시작해 ‘내 인생에 영원히 남을 화려한 축제여~’로 이어지는 ‘서울 서울 서울’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불발로 끝나고, ‘서울 서울~’은 노래방 인기곡으로만 남았다.
“내가 왜 뽕짝가수 입니까?”
1986년 시인 김지하가 살고있는 강원도 원주교구에 조용필이 또 찾아갔다.
당대 최고의 ‘이야기꾼’과 최고의 ‘소리꾼’이 꽤 의미있는 주제를 들고 만난 자리였다.
조용필이 물었다.
”일본 최고의 가수 미소라히바리에겐 ‘엔카’가수, 루이 암스트롱에겐 ‘재즈’가수란 타이틀이 있는데 사람들이 날더러는 ‘뽕짝’가수래요.”
”음……”
”‘뽕짝’은 연주악기 소리이지 ‘장르’가 아니잖아요. 요샌 전자악기 볼륨이 커서 ‘쿵짝쿵짝-’ 하고 들리는데 그럼 ‘쿵짝 가수’란 말예요? 뭐 좀 우리말로 근사한 명칭 없을까요?”
“‘짜배기’가 어떨까? ‘육자배기’에서 ‘6’자 빼고 그냥 ‘짜배기’말야. 육자배기는 원래 전라도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농요의 한 갈래인데, 장단이 여섯박의 진양조를 단위로 하는 노래라는 데서 육자배기라는 이름이 붙여졌지. ‘6’자를 빼면 우리민족이 누구나 흥얼거렸던 민요를 총칭하게 되지. ‘짜배기’는 우리 가락의 근본중 근본이거든.”
”엥-??, 그럼 내가 ‘짜배기 가수’란 말예요?? 에-이-”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른 지금, 아직까지도 ‘트로트 가수’ 이상의 ‘근사한’ 명칭은 찾아내지 못한 상태다.
‘트로트’는 4분의 4박자로 구성된 서구 사교댄스의 변형 리듬이다.
20세기초 일본에 건너가 일본 민요에 접목돼 ‘엔카’라는 장르를 탄생시켰다.
그보다 조금 늦은 시기, 트로트가 역시 한국에 건너와 한국 민요에 접목돼 지금의 ‘트로트 가수’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조용필만은 트로트 가수들중에서도 예외로 분류된다.
조용필 노래 40년…’가왕(歌王)’이 흩뿌린 편린(片鱗)들-(하)
“노래 부를 수 없는 그날…난 죽을 것”
국내가수 최초로 ‘뮤지컬’시도
요즘 조용필의 무대공연은 일반가수와 달리 뮤지컬화 했다.
공연 때마다 무려 100여명의 조연들이 등장해 그의 히트곡들을 연극적 몸짓으로 이어나간다.
1996년 부터다.
조용필의 리허설 장면을 본 예술의 전당 관계자들이 그 해 대중가수로는 최초로 조용필의 예술의 전당 공연을 허락했다.
‘단 하루’뿐이라는 전제조건이 붙었다.
그러나 2340석의 오페라관은 순식간에 매진됐고, 예술의 전당측은 이듬해인 1997년 사흘, 1998년 엿새, 1999년 아흐레로 조용필에게 무대를 내줬다.
파격 또 파격이었다.
예술의 전당 오페라관 무대는 6조각으로 구성돼 있다.
위에서 밑으로, 밑에서 위로, 또 양옆에서 좌우로 각각 다른 별개의 무대가 나왔다 들어갔다 한다.
‘못찾겠다 꾀꼬리’를 부를땐 잡초가 우거진 철길위에 꼬마아이들이 뛰노는 무대가 옆구리에서 나오고, ‘단발머리’를 부를땐 단정한 옛날 여고교복 차림에 자주색 가방을 든 단발머리 여학생들이 삼삼오오 걸어가는 무대가 나온다.
노래하는 조용필은 때론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기도 하고 때론 밑에서 위로 솟아 나오기도 한다.
매회 공연에 동원되는 필수인원만 줄잡아 100여명에 달한다.
조용필의 해외공연이 더 이상 어렵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해외순방의 경우 1회공연에 순수 비용만 적어도 30만불 정도가 들어간다고 하니 LA,뉴욕을 빼곤 미주 어느 한인사회에서도 조용필공연 유치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자는 타고난 가수다.
쉽게쉽게 부르는 것같은데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애절한 정서가 배어나오고, 마치 모짜르트의 작곡노트 원본과도 같은, 완벽한 어울림이 구사된다.
그녀의 타고난 목소리가 얼마나 뛰어나면 일본의 돈 많은 부호들이 이미자 사후(死後) 시신을 사들여 성대 연구를 하겠다고 나서는 정도가 됐을까.
이에비해 조용필은 엄청나게 지독한 노력형이다.
서울 경동고교 시절 기타를 잡기 시작한 조용필을 가수가 되리라고 생각한 친구들은 없었다고 한다.
이미자와 조용필의 차이
그가 목청을 틔운 장소는 여늬 판소리 명인들처럼 폭포수 아래가 아니라 친구집 지하실이었다.
좁은 지하 공간에서 당시 별표전축 볼륨을 최대로 키우고는 자신의 노래하는 목소리가 자신의 귀에 들릴 때까지 부르고 또 불렀다.
목구멍에서 피가 나고, 가라앉기를 수십, 수백번…하루에 수백곡의 노래를 불러도 전혀 성대에 지장이 없는 지금의 목청을 갖게됐다.
그 목소리로 한소절 한소절 온 몸의 힘을 쏟아 절규하듯 뿜어낸다.
지구레코드사에서 신곡 녹음을 할때면 1주일이건 열흘이건 녹음실을 떠나지 않는다.
벤츠 뒷자리에 베개를 놓고 드러누우면 키가 딱 맞는다.
그 곳에서 잠을 자고, 잠에서 깨어나면 녹음실로 올라간다.
‘필’(feel)을 놓지지 않기 위해서다.
한번은 녹음이 끝나갈 무렵, 레코드사 문예부 한 여직원이 고개를 갸우뚱 하며 “어디서 들은 적이 있는 것같다”는 말을 던졌다.
조용필은 레코드사 전직원을 동원해 ‘비슷한 멜로디’ 추적에 나서 결국 미국의 어떤 팝송과 4마디가 같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조용필은 열흘동안 집에도 못들어가고 거의 완성단계에 있는 악보들을 모조리 찢어버리면서 스텝들을 향해 “죄송합니다.
다시 새로 시작합시다.
”고 외쳤다.
레코드사 직원들이 어안이 벙벙해 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보통 가수라면 열이면 열, 표절에 걸릴만한 부분만 슬쩍 고쳐 넘어가는게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조용필은 그 후 또다시 열흘동안을 꼬박 지난 열흘과 똑같이 벤츠 안에서 잠을 자며 새 앨범을 완성해 냈다.
이를 본 관계자들은 그의 끈질김에 한결같이 혀를 내둘렀다.
조용필이 한 해에 벌어들이는 수입은 수십억원에 달한다.
그러나 지금 그의 수중에는 거의 한푼도 없다.
이유는 자신의 음악을 업그레이드 하는 일에 수입금 전액을 재투자 하기 때문이다.
우선 그룹 ‘위대한 탄생’에 쏟아붓는 돈이 엄청나다.
‘위대한 탄생’ 멤버들은 다른 가수를 위한 연주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오로지 조용필 노래에만 매달려 공연이 없는 날에도 온종일 연습을 한다.
또, ‘위대한 탄생’이 연주하는 악기는 언제나 최신형 최고급이다.
현재 갖춘 악기보다 조금이라도 더 성능이 좋은 악기가 나오면 값을 묻지않고 교체한다.
한번은 기자들이 조용필에게 쌩뚱맞은(?) 제안을 했다.
“천하의 조용필도 히트곡이 없으면 꽝이다.
잘 나갈때 땅을 사두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조용필은 눈썹하나 까닥않고 태연히 대답했다.
“기자 여러분들은 기자생활 관두면 생계가 어려워질테니 땅을 사둬라. 난 내가 노래를 부르는 한 굶을 염려는 없으니 내 걱정은 하지말라.”고 말했다.
기자들은 “아 글쎄 노래를 못부르게 될 때를 생각해서 땅을 사두라는 것 아니냐?”고 재차 물었다.
이에대한 조용필의 대답이 그의 삶과 인생을 한마디로 표현해준다.
“난 노래를 부를 수 없으면 그 날로 죽을 것입니다.
노래 없는 조용필은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
조용필을 지근거리에서 취재한 경험이 있는 가요담당 기자들은 그에게서 세번 놀란다.
우선 음(音)을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듣는 절대음감에 놀란다.
나뭇가지에서든, 가로등 불빛에서든, 하늘에 떠도는 흰구름에서든,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언뜻언뜻 누구도 생각해 내지 못하는 음계가 생겨난다.
그럴 때마다 그는 주변사람들에게 “지금부터 아무 소리도 하지말라”는 신호를 보내고는 곧장 집으로 들어가 방문을 걸어 잠근다.
그리고는 몇날 며칠을 꼬박 굶고 하나의 곡을 완성시킨다.
두번째는 끈질긴 연습이다.
가요프로그램 순위가 있는 날이면 방송국 가수대기실은 미리미리 도착한 톱10가수들로 이야기 꽃이 피게 마련인데 그때마다 조용필은 보이지 않는다.
대체 어디 간걸까 찾아보면 그는 늘 가장 작은 방 한곳에서 문을 걸어잠그고 고래고래 발성연습을 하는 모습이 발견된다.
“천하의 톱가수가 웬 연습을 여기와서도 또 하느냐?”고 물으면 들은 체도 않고 또 다시 연습에 몰입한다.
‘가왕’이 던진 3번째 메시지
세번째는 ‘어쩌면 인간이 노래 하나에 저렇게도 완벽히 매달릴 수 있을까?’ 하는 점에 놀란다.
가수도 인간인 이상 일상생활의 희노애락에 움직일만도 한데, 그가 노래에 매달리는 집념은 일반인으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공연장 무대위에서 수십곡을 그렇게 열창하고서도, 공연관계자들과 저녁식사후 지인들과 모인 자리에서 또 다시 노래를 끝없이 부른다.
부른다기 보다 즐긴다는 표현이 더 맞을까.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못 이기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못 이긴다’는 말이 있던가. 어쩌면 조용필은 이 3가지를 다 갖추고, 그 위에 목숨까지 걸고 있는 것만 같다.
’조용필 노래 40년-’ 지금 그에게 “국내 가수중 라이벌이 있나면 누구냐?”고 묻는다면 그건 너무 어리석은 질문일까?
<끝>
끝>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