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린, 김신묵 부부의 아들이자 손녀인 문동환(87) 목사와 문영금(50)씨가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과 ‘문익환 평전’ 출판기념회 및 강연회를 위해 토론토를 찾았다. 이들을 만나 간도의 민족, 교육 운동과 기독교 정신, 문익환 목사에 대한 이야기 들을 들었다.
-토론토와 인연이 깊은데.
▲동환-1930년대 아버님이 토론토대 신학교 유학 시절 크리스마스 때 선물을 보내주시곤 했으니 인연은 그 때까지 거슬러 오른다. 55년께 토론토서 공부하는 누이동생을 만나려고 왔던 게 아마 첫 방문인 듯 싶다. 부모님이 71년 캐나다로 이민해 토론토서 사셨으니 내게도 각별한 곳이다.
▲영금-74년 캐나다로 이민 와 남매를 낳고 89년까지 살았다. 토론토에서 공부하고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했다. 딸은 요크대를 나와 이곳에 살고 아들은 한국에 있다.
-조부모님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영금- 할아버님은 무엇이든지 기록으로 남기는 분이시다. 따라서 간도, 만주, 제주도 피난 등등 격동의 시대를 사셨지만 상당한 분량의 기록과 사진이 남아 있다. 나는 주로 할아버님의 기록을 정리하고 사촌동생인 영미가 구술 테이프 등을 바탕으로 할머님의 기록을 맡아 정리했다. 두 분과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혼자 계신 어머님(박용길)께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자료를 요청하는 일이 흔했다. 더 늦기 전에 모든 자료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책을 내게 됐다.
-고 문익환 목사는 일반인들에겐 민주화 투사로서 강인한 이미지다. 가족으로서 가까이에서 본 모습은 어떠했나?
▲동환-형님은 중학교 때까진 평범했다. 일본 신학교 재학 중 언어에 재량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신화적인 내용을 무조건 사실마냥 가르치는 교수와 언쟁을 벌이며 성경 번역의 뜻을 품었다. 히브리어에 능통했다. 성경 속 수많은 시를 번역하며 시인이 됐다. 한신대 교수로 재직하며 성경번역에만 매진했던 그가 전태일 등의 죽음을 계기로 민주화 운동 전면에 나서게 됐다. 갈등하던 그에게 하나님은 “너는 왜 못해?”라고 말씀하셨다 한다.
▲영금-예민하고 다정다감하신 분이셨다. 직관이 뛰어나 아버님이 계실 땐 무슨 일이든 걱정이 없었다. 여쭤보면 항상 가야할 길의 방향을 잡아주셨다.
-문병규, 문재린, 문익환 3대에 걸쳐 이어지는 그토록 간절한 민족 운동의 원인은 무엇인가?
▲동환-우리 집안은 한 마디로 통일에 미친 가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원산은 지났다. 평양은 아직 멀었지’하셨다. 어머님은 ‘통일은 다됐어’라고 하고 숨을 놓으셨다. 간도의 명동촌에서 민족의 독립을 뼛속 깊이 배우고 자란 그 분들에게 해방의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남북이 갈리고,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전쟁을 하고 분단된 상황은 견딜 수가 없는 것이었다.
▲영금-남쪽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에게 간도출신의 우리는 항상 이방인이었다. 이번에 책을 내면서 나를 포함한 집안 사람들, 또 우리와 달랐던 사람들 양 편에 대한 이해가 생겼다.
-현재 한인들의 기독 신앙생활에 대한 평가는?
▲동환-한국의 기독교는 애당초 민족과 한 몸이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내 민족을 구하라는 성경말씀대로 교회와 학교를 같이 세우며 믿음 안에서 민족의 내일을 키웠다. 하지만 이제 많은 교회들이 제 덩치를 불리는 데에만 신경 쓴다. 민족과 나라를 위하는 맘을 찾아야 한다.
-1921년 북간도 명동 출생, 은진중학교 졸업 후 일본 동경신학교 유학. 조선신학교(한신대) 졸업 후 미국 피츠버그 신학교와 프린스턴신학교 거쳐 하트포트신학대학원 박사. 한신대 교수, 서울 수도교회 목회. 3.1 구국선언으로 투옥, YH 사건으로 투옥. 80년 광주민주화 운동으로 해직돼 미국으로 망명. 뉴욕장로교신학대학원 교수.
◑문영금씨는
-48년 문익환 목사 맏딸로 출생. 캐나다 이민, 토론토대 수학,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다 귀국, 문익환 목사 및 집안 관련 업무를 맡아 돌봄. 2006년 사촌동생 문영미씨와 조부모 회고집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