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해 전 가을, 대구 팔공산 자락에 집을 짓고 사는 이규리 시인의 집에 갔다. 거실에 난 커다란 창문을 내려다보니 살구나무가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녀의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에 실린 시 '나무가 나무를 모르고'를 탄생시킨 나무를 보면서 감탄했던 그날, 이규리 시인은 내게 책을 세 권 선물했다. 이성복 시인의 시론집과 산문집이었다. '불화하는 말들','무한화서','극지의 시'라는 제목의 책들, 책에는 이성복 시인의 싸인이 적혀 있었다. 미국에서 온 나를 위해 싸인까지 받아 놓은 그녀의 마음이 고마웠다. 이규리 시인은 대구까지 온 김에 자신의 스승이신 이성복 선생님을 만나고 가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정든 유곽에서', '아, 입이 없는 것들' 등의 시집으로 한때 나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었던 시인을 만난다니 나는 가슴이 뛰었다.
그는 작고 깡마른 몸매였다. 내가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겠느냐고 묻자 시인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어찌 멀리 있겠는가?(未之思也언정 夫何遠之有리오)" 라는 논어의 한 편을 종이에 적어 주었다. 산 앵두꽃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리운 이가 멀리 있음을 한탄하니까 공자 왈, 생각이 난다면 아무리 멀어도 찾아갈 수 있다는 내용의 글이다. 생각 하고 뜻을 세우면 먼 것이란 없다는 반론의 시였다. 그것이 우문현답이었다는 것을 나는 일 년 후에야 알았다.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이성복 시인의 시론집을 진지하게 읽기 시작했다. 읽을수록 묘한 책이었다. 날 것들이 모두 은유가 되어 펄떡거리고 있었다. 그의 시론을 이해하려면 자신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아예 처음부터 쫓아 들어가야 한다. 그는 시 쓰기가 단숨에 배울 수 있는 기능이 아니라 세상에 태어난 처음 순간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행보를 응시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작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말처럼 "자기 안을 끝까지 들여다보는 것"이 시 쓰기이기 때문이다.
"단방에 녹다운시키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잽'날리듯이 말을 툭툭 던지세요. 기필코 홈런을 치겠다는 심리는 삼진 아웃을 불러와요." 이 구절을 읽으며 나는 웃음이 터졌다. 가끔은 간담이 서늘해지면서 알 수 없는 오한이 나기도 했다. "시 쓸 때는 대상을 앞에서 끌지 말고 뒤에서 밀어줘야 해요. 그처럼 소극적 자세를 취하는 게 가장 어렵고 중요한 문제예요. 오직 힘 있는 사람만이 '소극적 능력'을 가질 수 있어요." 힘 있는 사람만이 소극적 능력을 갖출 수 있다니…. 숨이 턱턱 막혀오기도 했다. "시를 쓰는 건 인생을 바꾸는 거예요. 바꾼다는 건 서 있는 방향을 바꾸는 것이지, 자리를 바꾸는 건 아니에요. 원 안의 모든 점이 중심을 향하듯이, 모든 방향은 0의 자리를 가리켜요. 그곳은 모든 것을 내려놓는 자리예요."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어떻게 살란 말인가? 삶의 이치도 터득하지 못하면서 나는 언어를 부리겠다고 호기 만만 했던 것일까?
이규리 시인과 함께 이성복 시인을 만나 문학이야기를 듣던 그해 가을, 우리는 대구 번화가를 지나 후미진 골목에 있는 식당을 찾았다. 식탁이라고는 서너 개 정도였을 정도로 소박한 곳, 우리는 그곳에서 고등어 찜과 콩나물국 밥을 저녁으로 먹었다.
그날 식사를 마치고 음식 값을 지불하는데 싸움이 붙었다. 식당 주인은 한 그릇에 5000월이 정가이니 정가대로 내라고 했고 이성복 시인은 콩나물도, 호박도, 두 번씩이나 채워 주었으니 적어도 한 그릇에 8000원으로 계산해서 받아야 한다고 완강히 고집했다. 둘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듯 말싸움을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싸움은 이성복 선생님의 승리로 끝났다.
먼 미국에서 온 사람을 변두리 국밥집으로 데려가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음식 값을 정가 보다 더 내겠다고 싸우는 사람도 이성복 선생님이 처음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시가 사람 같아 보인다. 더욱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