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게 복잡하고 힘든 일 투성이지만 다행히 아주 쉽고 신나는 일도 많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집에서 하는 생명공학, 김치 만들기이다.
미생물의 발효작용을 활용하는 거지만 과학적 원리 같은 건 몰라도 좋다. 약간의 노력으로 담가 온가족이 몇주 동안 실컷 먹을수 있으니 가성비로 따져도 이렇게 훌륭한 취미활동은 드물다.
우리가 김치하면 떠올리는 고춧가루가 듬뿍 든 김치는 사실 역사가 길지않다. 고추는 서양에서 일본으로 먼저 전해졌고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 기간 중에 한반도에 유입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전에는 짠지나 동치미 같은 것이 김치의 주종을 이룬 듯 하다.
한편 김치의 조상이라고 할 만한 것은 꽤 긴 역사를 갖고 있다. 오이절임같은 것이 약 3000년 전의 중국문헌 '시경'에 나오고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시대에는 김치와 비슷한 발효음식을 먹은 것이 삼국사기 등에 기록되어있다. 삼국시대엔 대략 백김치 같은 것이었고 고려시대에 오면 동치미, 나박김치 같은 것이 등장한다. 김치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지만 대략 '침채(沈菜)'라고 여겨지고 있다. 절인 채소라는 뜻이다.
조상들이 수천 년간 만들어 드신 것이니 절대 어려울 리 없다고 생각하며 몇 년 전에 처음 해보았는데 맨 처음 한번만 실패하고 그뒤로는 잘 해먹고 있다.
배추, 무우, 총각무, 얼갈이 배추, 열무, 오이, 갓, 양배추 등 야채만 준비되면 김칫속이야 한가지만 만들면 된다. 배추김치, 겉절이, 무우생채, 깍두기, 총각김치, 열무김치, 갓김치, 동치미, 나박김치, 백김치, 오이소박이 등 동시에 예닐곱 가지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다.
처음엔 신이 나서 친구네 나눠주고 그랬는데 친구들이 가만보니 안 그랬으면 하는 눈치이다. '저 집 아저씨는 김치도 담그는데…' 하면서 부인들이 스트레스를 주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요즘은 자제하고 조금씩만 심심할 때 만들어 먹는다.
독학한 김치 담그기이지만 경험적으로 봤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풀을 쑤어 넣는 것이다. 찹쌀가루 풀이든, 밀가루 풀이든, 심지어는 찬밥을 믹서에 갈아넣던 꼭 넣어준다. 풀을 쑤어 넣어주는 건 김치 유산균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탄수화물을 충분히 공급한다는 것이다. 풀을 많이 넣으면 끈끈해서 양념이 잘 묻어있게 해주고, 덜 넣고 물을 많이 더하면 개운한 맛 김치를 만들 수 있으니 취향대로 넣으면 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만들고 나서 하루 정도 상온에서 익힐 때 공기가 안 통하게 닫아 놓는 것이다. 김치발효를 해주는 유산균은 산소를 필요로 하지 않는 혐기성 세균 (anaerobic bacteria)이다. 열심히 만들었는데 김치 그릇이 덜렁 열려 있으면 자라라는 김치유산균 대신 엉뚱한 세균이 자랄 수 있다. 그러면 김치 대신 퀴퀴한 냄새가 나는 이상한 물건이 만들어진다. 요컨데 미생물이 자라면서 생기는 부산물이 김치나 치즈처럼 우리 마음에 들면 발효라고 하고, 불유쾌한 것이 생겨나면 부패라 한다.
김치 만들기는 딱 2단계, 매우 간단하다. 첫째, 채소를 소금에 절인다. 채소가 삼투압 효과로 부드러워지고 소금간도 배인다. 둘째, 김칫속을 섞어준다. 잘 닫아 하루 이틀 익히고 냉장고에 보관하면 끝! 내 멋대로 해도, 대충대충 해도 제법 맛이 난다. 직접 만든 김치가 익으면서 깊어지는 맛을 종류별로 즐기는 재미가 참 쏠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