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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신인문학상-단편소설부문 가작] 조병무 작 '저무는 후세타닉' (11) <끝>

Los Angeles

2008.05.02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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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하이츠의 삶의 터전이었던 테일러일을 접고 교우의 소개로 인랜드엠파이어의 일식 레스토랑 '복성'에서 새로운 인연들과 새로운 세월의 매듭을 풀었다.

인랜드로 떠나기 전 레리얼토 생활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빅토빌 언덕의 커피하우스를 찾았다.

날계란으로 멍든 눈 주위를 문지르던 창가 시린 손을 호호 불며 어깨를 움츠렸던 벽난로 그리고 맥주에 취해 엎어졌던 탁자에선 배어있던 도경의 한숨이 묻어 나왔다.

쳐진 어깨에 실린 삶의 무게까지 감당 해야 했던 낡은 의자들도 아직 그대로다.

고향이 동두천인 콧수염이 넉넉한 주인 아저씬 '커피하우스 조이앤쵸이'란 간판 글씨 옆에 술 취한 도경의 걸음처럼 갈지자로 '정거장'이라고 한글로 써놓았다.

배고팠던 어린 시절 엄마가 사오는 고구마를 늘 정거장에서 만났단다.

아저씨의 배고픔이 마중 나간 건 엄마가 아니라 군고구마였다.

그 동안 술에 취해 탁자에 엎어진 도경을 아저씬 무던히도 집으로 실어 날랐다.

아저씨는 무언가 도경에게 위로의 말을 꺼내려 목젖을 깔딱거리다가 가슴속으로 밀어 넣는다.

인랜드엠파이어로 돌아온 도경은 늘 분주함 속에 파묻혀 지나간 일상들은 거꾸로 돌린 시계 태엽 속으로 까마득하게 묻었다.

찾으려고 더듬었던 좋은 기억도 잊으려고 팽개쳤던 칼날 같은 통증도 죽은 기억처럼 정지돼 있었고 빈공 상태의 머릿속엔 겹겹이 쌓여 묻혀 있었던 소망들이 봄나물 새순처럼 자라고 있었다.

바쁜 일상의 고단함은 따뜻한 심성의 '복성'식구들이 풀어 주었고 잠들기 전의 외로움은 유란 언니와 미순 언니의 목소리가 달래 주었다.

가끔 볼 수 있었던 줄리아는 어미의 정 없이도 맑고 건강한 유쾌한 아이로 잘 커가고 있었다.

일식집 '복성'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을 때까지 그렇게 몇 해가 무탈하게 지나갔다.

줄리아가 학교를 들어가던 해 도경은 쉰 고개를 넘긴 반백의 머리로 커네티컷의 유란 언니 곁으로 와 '테일러 명줄'이란 가게를 냈다.

가증스럽고 잔인했던 '레프티'로부터의 고통스런 시련에 치를 떨며 한여름에도 오한이 들어 부르르 떨다 눈물이 앞을 가려 손끝을 수도 없이 바늘에 찔렸던 재봉틀 앞에 다시 앉았다.

그렇게 또 하나의 세월이 후세타닉 강 물결에 춤추는 햇살에 몸을 적시며 매듭을 풀어갈 무렵 미순 언니가 거진 앞바다의 냄새까지 가슴에 담고 도경의 곁으로 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가슴 졸이며 민주투사의 아내로 살던 애린이는 이젠 어엿한 국회의원 사모님으로 바뀐 세상을 살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주며 맨하튼의 한인타운에 '현경'이란 이름으로 일식집이나 하자며 박장대소한다.

우린 벌써 상상의 가게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렇게 지난밤 늦도록 미순 언니의 전화 속 웃음을 안주 삼아 마신 술에 절절히 끓다 못해 녹아 내린 가슴에 묻었던 명세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도경은 회한 가득한 눈물로 통곡을 하고 있었다.

상자 뚜껑이 열리며 박제됐던 죽은 기억들이 혈관에 실핏줄이 돋고 심장이 뛰면서 숨을 쉬기 시작했다.

과거로의 오랜 여행에서 현실로 돌아와 눈을 떴다. 명세는 보이질 않았다.

명세 역시 도경이 절규처럼 토해내는 통곡에 가슴이 저려와 견딜 수가 없었다.

도경은 조용히 상자를 닫고 명세의 집을 나왔다.

도경은 지금 이 벅차 오르는 가슴에서 느끼는 환희를 행복으로 누릴 권리가 없음을 잘 안다.

바닷물에 씻긴 햇살이 아직 눈부시다.

올려다본 하늘엔 뭉게구름이 부채 살 끝에 걸린 바람처럼 하늘거린다.

보아온 하늘 중에 가장 따뜻한 하늘이다.

다행히 판도라가 열어 보았던 상자는 아니었다.

상자 안에 가득했던 육체적 고통 그리고 증오와 분노 배신과 허망으로 얼룩진 정신적 고통은

그 긴 세월 동안 인내와 용서로 용해되어 기쁨과 희망으로 변해 있었다.

명세의 마음에서 용서라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을 읽었다.

뜨거운 눈물이 감사와 축복으로 도경의 두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뉴욕 아쿠아리움'이 눈에 들어오고 커다란 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놀이기구가 햇살에 일렁이며 뭉게구름 속을 파고든다.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이 수평선만큼이나 아득했고 세공 된 보석처럼 윤기 나는 모래알 사이에서 많은 사람들이 잡힐 듯 멀어져 가는 가을을 줍고 있었다.

보자기로 눈이 가려진 채로 머문 자리도 없이 어둠과 햇살 속을 떠돌며 과거로의 여행을 시작했던 그 자리로 도경은 돌아왔다.

강태공의 발 밑에서 분주했던 바위는 조용히 내일을 기다리고 있었고 햇살이 오글거리던 물결 위로는 빛을 감춘 태양이 붉게 노을로 내려와 앉아 있었다.

후세타닉강을 온몸으로 품었던 하루 해가 달을 부르며 저물어갔다.

〈화요일 29면 논픽션 "하룻강아지의 미국 극복기'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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