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전기 자동차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전기 자동차를 만드는 자동차 제조 회사가 여럿이 있지만, ‘테슬라’라는 회사가 사람들의 이목을 가장 많이 끄는 것 같다. 무공해 차량이라는 강점 말고도 소음 없는 고급 차량이라는 장점을 내세워 명품을 찾는 고객을 노리는 상품 전략 때문이다. 그런데 ‘테슬라’라는 이름에 대해 많은 사람이 생소하게 생각한다. ‘테슬라’는 사람의 이름이며,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이름을 날리던 전기 과학자이자 발명가이기도 하다. 다만, 발명왕 에디슨의 그늘에 가려 기를 펴지 못하고 살다가 간 사람이다. 더구나 테슬라는 에디슨의 철천지원수인 라이벌이었다고 한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에디슨(Thomas Edison)은 ‘발명왕’이란 타이틀이 붙어 다닐 정도로 많은 것을 발명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1847년 오하이오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대인으로 알려지기도 하지만, 아직 뚜렷이 확인된 적은 없다. 에디슨은 어려서부터 만물에 호기심이 많아 정규교육을 받을 수 없을 만큼 정상에서 벗어난 아이였다. 다행히 어머니가 교사였던 관계로 집에서 ‘홈스쿨링’으로 교육을 보충했다. 어린 시절 달걀을 품어서 병아리를 까겠다는 도전은 모든 사람이 아는 일화이다. 그만큼 엉뚱할 정도로 실험정신이 강했다는 뜻이다.
집안이 넉넉지 않아 젊은 시절 기차를 타고 기차 안에서 신문을 판 적이 있는데, 승무원 칸의 한구석에서 과학 실험을 하다가 화재를 일으켰다. 이때 화가 난 기차 차장에게 세게 얻어맞을 때 귀의 고막이 터져 평생 청각장애를 지니고 있었다. 기차에서 신문을 팔면서 유선전신에 호기심이 발동해, 전신기사가 되었다. 20대 후반 그는 효율 높은 전신 기기를 발명하기에 이르렀다. 이 발명 특허로 큰 돈을 번 그는 1876년 본격적인 발명 활동을 위해 발명 회사를 차리고 발명을 계속하였다. 자동발신기, 축음기, 전화 송신기, 고효율 발전기, 활동사진, 축전지 등을 발명함과 아울러 전차, 발전소 등 거창한 시설까지 세우기도 했다.
평생 2,300개가 넘는 발명이 에디슨에 의해 이루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에디슨이 순순한 발명을 많이 한 것이 아니라, 그의 발명으로 알려진 것 중의 대부분은 남의 것을 좀 더 실용성 있게 개량한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특히 그가 테슬라에 대해 가졌던 라이벌 의식과 방해 행위는 발명왕의 이름을 무색할 정도라고도 한다.
한편, 테슬라(Nikola Tesla)는 1856년 지금의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난 세르비아 사람으로 젊은 시절에 미국에 이민했다. 그는 미국에서 전기과학자, 발명가로 성공했다. 그의 가장 큰 성과는 교류 전기의 발명이다. 그의 명성 때문에 2006년에는 크로아티아에서 테슬라 탄생 150주년을 맞아 2006년을 ‘테슬라의 해’로 선포하고, 거의 동시에 세르비아에서는 베오그라드 공항을 테슬라 공항으로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두 나라가 서로 테슬라가 자기 나라 사람이라고 우기고 있다.
좌우간, 테슬라는 젊은 시절 에디슨 연구소에서 근무했는데, 에디슨과 전기에 관해 의견 차이가 심해 충돌이 잦았다. 에디슨은 전기의 기본은 직류 전기라고 주장하고, 테슬라는 교류 전기가 더 유용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일부 전문가에 의하면 질투심이 강한 에디슨이 자기 후배가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것에 심한 질투를 느껴 직류 전기에 더욱 집착했다고도 한다. 어쨌든 둘은 곧 헤어지게 되고, 테슬라는 따로 독립했으며, 이후 전기에 관해 무수히 많은 발명품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에디슨의 그늘에 가려 그때 당시에는 세상의 시선을 별로 끌지 못했다. 에디슨의 업적이 찬란해서도 그랬지만, 에디슨의 끊임없는 방해 공작 때문에 그랬다는 주장도 있다. 테슬라의 업적에 관한 평가는 20세기 후반에나 와서 제대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전기 자동차 회사에 이름을 붙인 것도 테슬라의 전기에 대한 기여를 지금에나마 기념하기 위한 일이라고 보면 되겠다.
어떤 면에서 보면, 에디슨과 테슬라가 전기에 대한 서로 다른 의견으로 경쟁했기 때문에 전기에 관한 혁신을 더 빨리 이루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 혜택을 우리는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