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이진삼 육군참모총장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한강둑의 복구공사를 협의하고 있다. 오른쪽은 당시 현대건설 회장이었던 이명박 대통령.
어찌 보면 1950년대 중반까지도 현대는 장비가 공사를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하는 것처럼 되어 있었다. 장비 대신 풍부한 유휴 노동력을 투입했고 거기다가 정 회장을 포함한 몇몇 아이디어맨(측근들)이 지혜를 짜내 최대한 노하우를 동원하는 그런 공사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령교는 인력만으로 할 수 있는 공사가 아니었다. 현대가 제법 장비를 갖추기 시작했다면 당시로서는 국내 최대 공사였던 1953년 4월의 5500여만환짜리 고령교 공사와 1955년부터 계속된 가창 댐 공사를 맡았을 때였을 것이다. 여하튼 고령교 공사로 얼마나 속을 태웠는지는 정세영 회장이 생존해 있을 때 들려준 유학 중에 겪었던 내용만으로도 짐작이 될 일이었다.
"내가 컬럼비아대학에 유학하고 있을 때예요. 그러니까 나는 컬럼비아대학하고는 인연이 없게 된 셈인데 1년쯤 다녔을 때야. 그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던 학비가 어느 달부터 서울에서 오지 않는 거야. 매달 100달러씩 큰형님(정주영)이 꼬박꼬박 보내주는데 갑자기 끊어지고 그러다가 어떤 달에는 한꺼번에 몰려오기도 하고 말이야.
그러니까 얼마나 불안해. 한꺼번에 몰려온다고 해서 몇 천 달러씩 오는 것도 아니지만 유학생한테는 100달러든 10달러든 고정적으로 와야 규모 있게 쓰지 그렇지 않으면 친척 하나 없는 미국 땅에서 온몸으로 한기를 느껴야 된다고. 그게 굉장히 무서운 거예요. 물론 유학생 비자니까 아르바이트를 못하지만 다들 숨어서 했고 나도 중국집에서 접시 닦는 일을 했지만 공부가 되나.
정말 불안해서 장학금을 주겠다는 학교를 찾았더니 오하이오주에 있는 주립대학 마이애미 유니버시티에서 장학금 줄 테니 오라고 해요. 결국 마이애미대학에서 졸업을 하게 됐는데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때 큰형님이 고령교 공사 때문에 진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던 거예요. 100달러를 못 보낼 정도였으니까 말이야."
그러나 불행했던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 정 회장에게는 별로 즐거운 일도 아니고 재계의 거목이 되어 있을 때는 하찮은 일이기도 했겠지만 정주영 회장은 '그거? 인플레 때문에 고생했던 거야'라고 간단히 결론을 내버렸다.
"하도 그눔의 공사 때문에 속이 상해 액수도 잊어버리지 않는데 그게 당시 돈으로 5478만환짜리 공사예요. 그때는 컸지. 원으로 환산하면 얼마야? 그 후에 10분의 1로 화폐개혁을 했으니까 547만원밖에 안 되나? 하하. 근데 문제는 물가상승이야. 공사를 하는 도중에 인플레가 어찌나 심한지 당해낼 수가 없는 거예요. 공사를 시작할 때 40환이던 쌀 한 가마 값이 공사 끝날 무렵에는 400환도 아니고 무려 4000환이 된 거야. 그렇다고 계약할 때 5478만환으로 공사를 묶어놨는데 인플레가 됐다고 공사비를 다시 산정해서 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러니 당해낼 재간이 있어? 그사이 자재 값이니 인건비니 마구 오르는데 말이지. 그래서 고생을 한 거야."
얼핏 들어서는 임금이나 자재 값 인상으로 손실이 생겼다는 정도일 것 같았지만 단순한 고생이 아니었다. 그동안 벌어놓은 돈을 전부 털어 넣고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밀려들었다는 것이다.
도끼를 들고 찾아와 마루를 찍는 빚쟁이가 있는가 하면 노임을 주지 못해 공사장 인부들이 매일 파업을 하고 나타나기만 하면 해치겠다면서 낫을 들고 대문을 지키는 자재상 종업원들까지 있었다고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정인영 이춘림을 비롯한 김영주(한국프랜지 명예회장) 등 측근들이 '현대'라는 간판을 내려야 하느냐 마느냐로 숙의를 거듭했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더라는 것이다. 자금을 구하러 쫓아다니던 정 회장이었지만 간판 얘기만 나오면 화를 냈기 때문이었다. 김영주 회장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살기가 돌 정도로 심각한 경험은 처음 아니었습니까?
"명예회장님한테 들으셨겠지만 그분은 좌절이라는 게 없습니다. 심각한 정도가 아니라 까딱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분위기였는데 절대 간판은 못 내린다는 거지요. 그러면서 이 위기만 넘기면 괜찮을 거라고 위안을 주고 말이지요. 참 도전적이고 좌절하시는 걸 보지 못했어요.
그럼 왜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느냐 비유를 쉽게 한다면 그 전에는 오로지 곡물 수가에 의존했습니다. 그때 쌀 한 가마니에 40환인가 했는데 공사 끝날 무렵 그게 4000환까지 올라갔어요. 그러니까 물가지수가 한 2년 사이에 100배가 되는 거예요. 공사 금액은 요지부동으로 묶어놓고 물가가 올라갔으니까 말할 수 없는 적자를 봤을 거 아니에요. 그래가지고 최 부사장 정인영 회장 이춘림 회장 이런 사람들이 공사를 중단하자 더 이상 계속 못하지 않느냐며 공사를 중단하자고 했어요.
그랬더니 명예회장님이 '그러면 간판을 떼자 이 말이냐 건설업을 크게 한번 해보겠다는 꿈도 이루지 못하고 여기서 손들고 항복하자 이거냐. 나는 그렇게 못하겠다 어떤 일이 있어도 끝을 내야 되겠다.' 아주 완강하신 거지요."
-자금이 없어서 최악의 상황까지 갔는데도 간판을 붙잡고 있는 겁니까?
"명예회장님 뜻이 그런 거예요. 그러니 어떡합니까 돈은 없고. 이건 명예회장님도 그렇고 형제들도 그렇고 다들 기억을 못하실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돈암동 종점 쪽에 조그마한 20평(66.1m2)짜리 기와집이 있었고 또 정순영 회장이 삼성동에 역시 한 20평(66.1m2)짜리 기와집이 있었는데 그 집 두 채를 팔았어요. 빚을 갚아야 되니까 집이라도 팔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간판 내려야 돼.
어떤 해가 닥칠지도 모르고. 그 다음에 우린 어디로 갔느냐 집을 팔았으니 이사를 가야 되는데 전세 들 돈이 없잖아요. 그 전에 현대자동차 수리공장을 했던 자리가 있는데 개천 옆에 '하꼬방'을 지었어요. 루핑 지붕을 만들고. 정순영 회장도 그 옆에 자기네가 살 집을 짓고. 참 비참한 거지요. 엄청난 돈을 만지다가 졸지에 개천가에서 루핑 지붕 덮고 사는 거예요.
그때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나오는데 하여간 거길 어느 날 명예회장님이 와 보시더니 기가 막히죠. 그냥 등을 툭툭 두드려주시면서 내가 부자 되면 집을 사 주겠다고…그 말씀밖에 못해요. 우린 부자 된다는 말에 위안을 삼고 살아가는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