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책으로 볼 수 없는 세상도 나누고 싶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 여름 책에서 탈피해 내안에 있는 나만의 책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본다.
몇 년 전 한국에 갔을 때 친구가 집에 초대했다. '먼데서 온 손님'을 잘 대접하고 싶었던 친구는 귀한 아기 다루듯 강보에 잘 싸인 과일을 내왔다. 참외처럼 생긴 오렌지색 캔탈롭이라는 것으로 미국에서는 흔한 과일이었다.
심상치 않은 포장에 한층 고무돼 한 조각을 베어 물며 가격을 물었다가 차마 삼키기가 송구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특히나 내가 사는 이곳 캘리포니아엔 과일이나 야채재배에 좋은 기후조건을 갖추고 있어 싱싱한 과일과 야채를 철 따라 싼값에 마음껏 먹을 수 있다. 계절과 상관없이 오히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며 마음대로 먹으니 미국에 사는 이민자들은 최소한 과일에 관하여는 확실하게 축복받은 셈이다.
물론 옛날 고향에서 단물을 뚝뚝 흘려가며 먹던 복숭아나 태능 먹골 배 그리고 입술과 이가 시커멓게 물든 것도 개의치 않고 쏙쏙 빼어먹던 포도알맹이와 껍데기의 새콤달콤한 맛과는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이 가운데 복숭아는 참 많은 추억이 서려 있는 과일이다. 얇은 껍질을 벗기면 나타나는 뽀얀 속살을 한 입 베어 물때 그 맛과 독특한 향은 생각만 해도 금방 입에 침이 고인다. 닦는다고 뽀송뽀송 닦았어도 까실까실 따끔거리는 털 때문에 먹은 뒤에도 온 얼굴을 한 바탕 씻어내곤 했다.
모든 과일들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는 요즈음 과일을 사러 마켓에 갔다. 빛깔도 모양도 고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과일들이 나의 손길을 기다린다. 에덴동산의 하와도 무엇보다 화려한 빛깔의 유혹을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달밤에 복숭아를 먹으면 미인이 된다거나 붉으스레한 분홍 빛 여인의 뺨과 비교되는 복숭아는 과일 중에서도 미인과 관련이 아주 많다. 미국에서 'She is a peach'란 말은 아름답고 성적 매력도 갖추었다는 뜻이고 보면 복숭아는 동서를 막론하고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여긴다.
4000여종이나 된다는 복숭아의 생산량은 캘리포니아가 가장 많은데 여기서 만들어진 홍도 통조림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맛뿐만 아니라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는 복숭아의 씨와 꽃은 약제로 가지와 잎은 해독작용이 있어 어렸을 적에 이용하던 고약의 주원료였다. 그럼에도 복숭아나무를 집안에 심지 않은 이유는 신령스러운 나무로 여겼기 때문이다.
귀신들이 무서워하는 과일이라 제사 때 조상들의 귀신이 올 수 없다고 믿어 제사상에 복숭아는 오르지를 못한다. 복숭아는 장수의 상징으로 여기기도 하는데 손오공이 늙지도 죽지도 않는 몸인 것은 복숭아를 훔쳐 먹은 까닭이다.
'무릉도원'이라는 말은 무릉에 있는 복숭아꽃이 피는 속세와 동떨어진 아름다운 이상향의 장소를 말한다. 영원히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세상과 떨어진 별천지 유토피아의 상징이며 맛도 있는 복숭아 얘기를 하다 보니 분홍빛 복사꽃이 만발하던 고향에서 놀던 때가 그리워진다. 복숭아 꽃 살구 꽃 피던….
복숭아의 종류는 수도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털 없는 복숭아로 넥타린이라고 불리는 천도 복숭아를 가장 좋아한다. 대낮 찜통더위에 냉장고에서 바로 꺼낸 아삭아삭하고 새콤달콤한 맛이 요즘 같은 더운 여름을 이기기에 족해서 만은 아니다.
1920년 캘리포니아 중부지방 리들리에는 과일농사를 짓던 김호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훗날 사돈이 된 김형순과 동업으로 '김형제 상회'를 설립하고 원예전문가에게 자두와 복숭아를 접종한 털 없는 복숭아 넥타린을 개발케 했다. 이러한 그의 시도는 대박을 터트려 묘목을 독점 재배 전국 농장으로 과일은 포장돼 미 전국 도매상에 공급됐다.
성수기에는 120대나 되는 트럭이 동원됐는데 6개 농장에서 나오는 넥타린은 없어서 못 팔정도로 인기였다. 그는 수백 명의 한인이민 유학생들을 고용 초기 이민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넥타린으로 미주 최초의 한인 백만장자가 된 그는 그 돈을 잘 사용해 '미주 이민 50년사'를 쓰게 해 이민사에 중요한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재작년에는 한인 처음으로 로스앤젤레스 초등학교에 자신의 이름을 달게 됐다. 넥타린을 봉투가 배부르도록 담으며 주위를 휘-익 둘러본다. 나도 모르게 원조의 자부심으로 큰 소리가 치고 싶다. "너희가 넥타린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