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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형제여!

New York

2018.11.22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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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라는 말은 남자 동기간을 의미하지만 꼭 남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매도 남매도 모두 형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냥 그런 관계를 대표해서 형제라고 한 것뿐입니다. 말에는 이렇게 남자가 대표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옛 습관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변했는데도 말입니다. ‘자매’라는 말이 쓰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매학교나 자매도시가 대표적입니다. 이런 경우는 원래 학교나 도시가 여성 명사여서 자매라고 썼다고 합니다. 자매결연이라는 말도 하는데, 학교와 군부대가 자매결연을 했다는 말은 좀 어색하기는 합니다.

종교에서 형제는 매우 중요하게 자주 등장합니다. 형제는 이웃의 시작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 형제는 내 이웃이기도 합니다. 형제에 대해서 말할 때 마치 형제는 부모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한 최초의 경쟁자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각해 보면 형제가 서로 싸우기도 하고 서로를 질투하기도 하고, 서운해 하기도 하니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경쟁을 강조하는 것은 옳은 관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때로 부모의 인정과 사랑을 더 받기 위해 애쓰기도 하겠죠. 그렇다고 해서 경쟁이 분노가 되고, 폭력이 되어서는 안 되겠죠. 좋은 경쟁은 아름다울 수도 있고, 사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시작은 경쟁이지만 조화로 마무리되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경쟁은 형제에게 필수적인 요소일 수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함이 아니라 부모를 더 잘 모시기 위해서 경쟁하고 협력하고 조화를 이루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첫 번째 살인이 형제간에 일어납니다. 형인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수많은 수수께끼를 낳았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해되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있기도 합니다. 왜 하나님은 동생의 제사만 받고 기뻐했는지 풀리지 않는 의문도 있습니다. 유목과 농경에 대한 해석도 있고, 그 밖의 다양한 해석도 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그 무엇도 폭력, 살인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생이 사랑을 받았다고 폭력을 쓴다면 우리는 폭력을 써야 할 일이 어마어마하게 많을 겁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의 인생을 생각해 봅니다. 나보다 성공하고, 나보다 더 축복을 받는 수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별 것도 아닌 사람이 출세를 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재산을 쌓아갑니다.

생각할수록 억울할 겁니다. 나도 열심히 살고, 신께 복종하며 진리를 탐구하며 살았는데 말입니다. 착하게 살아서 오히려 피해를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그게 인생입니다. 그걸 인정해야 살 수 있습니다. 서로 다름에 분노하고 폭력으로 변한다면 결과는 살인일 겁니다. 저는 그런 마음이 걱정되고 두렵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는 형제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형제는 나의 이웃이고, 곧 우리 모두입니다.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고 해서, 나보다 더 좋아 보이고, 행복해 보인다고 해서 미워하고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 될 겁니다. 반대로 나보다 못하다고 해서 무시하고 내쳐야 할까요? 형제간의 이야기는 성경 내내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야곱의 이야기도, 요셉의 이야기도 형제의 이야기지만 경쟁이 용서로, 경쟁이 조화로 달려갑니다.

종교에서 형제가 아닌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형제는 용서하는 사람이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서로 협력하고 조화를 이루며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형제여!’라는 말에 고마움을 느끼고, 눈물이 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형제임이 고맙습니다. 형제라고 불러 주어서 고맙습니다. 형제가 되어 주어서 고맙습니다. 형제여!


조현용 / 경의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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