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뉴욕한국영화제에 초대된 국민배우 안성기(56)씨가 27일 맨해튼 코리아소사이어티에서 열린 좌담회에서 고백했다.
다섯살 때 영화 ‘황혼열차’로 데뷔한 안씨는 이후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다가 대학 졸업 때까지 10여년간 카메라를 멀리했다. 삼수 끝에 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로 진학한 이유는 전쟁 중이던 베트남에 장교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정작 그가 졸업할 즈음 베트남 전쟁은 끝났고, 진로는 캄캄해진 것. 취직이 되지 않자 안씨는 다시 카메라 앞으로 돌아왔다. 이후 30여년간 70여편에 출연하며 대한민국의 간판배우가 된다.
안씨는 이날 행사에서 현대 한국영화의 태동기·전성기·암흑기·황금기에서 현재까지 한국영화의 산 증인으로서 자신이 지켜본 한국영화사를 간추려 소개했다.
그는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가 연간 제작편수가 200여편에 달했고, 홍콩 제작자들이 안양의 신프로덕션에 드나들며 영화를 배워가던 한국영화의 황금기라고 설명했다.
“1961년 강대진 감독의 ‘마부’가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했고, 한국영화 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도 바로 이때 만들어졌지요.”
TV도 없고, 프로 스포츠도 없던 시기 스타는 곧 영화배우를 의미했다. 하지만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유신이 시작되며 검열을 강화됐고 표현의 자유도 축소됐다.
단 16개 영화사들이 반공·계몽·국책영화를 만들어 외화수입권을 따냈다. 이 시기 유일하게 검열의 망을 피할 수 있던 것은 바로 러브스토리. 변태적인 멜로드라마의 배역들은 남성 배우들을 위축시켰고, 수많은 배우들이 충무로를 떠났다.
“70년대 이전의 영화계 선배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이유입니다. 저도 그런 영화에 출연했지요.”
베트남 패망으로 충무로에 컴백했을 때 그가 출연한 영화가 ‘제 3공작’‘야시’‘병사와 아가씨들’‘우요일’ 등 계몽·반공 혹은 빗나간 러브스토리였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저격당하고 제 5공화국이 들어설 무렵, 아이러니하게도 영화계는 창작 자유의 봇물이 터지게된다. 그가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에서 중국집 배달부로 출연했을 때 영화계에서는 검열을 통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무작정 상경한 세 청년의 이야기를 리얼하게 그린 이 영화가 어수선한 틈에 검열이 나왔죠. 그러자 영화인들은 고무됐고 풍자적, 우회적으로 현실을 담은 작품이 많아졌습니다.”
그후 안씨는 임권택·이장호·배창호·곽지균·박광수·장선우 감독에서 강우석·이명세·이현승·이준익·김지운 감독까지 현대 한국영화사에서 중요한 연출자들과 작업해왔다.
“최근 한국영화의 수준은 세계시장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높아졌습니다.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고, 외국과 합작영화도 제작되고, 해외영화 출연 배우들이 있는 등 잠재력이 충분합니다.”
그러나 최근 2년간 한국영화계는 침체에 빠진듯 하다는 것이 안씨의 진단이다.
“스크린 쿼터가 축소됐구요, 한동안 쏟아져나왔던 신선하고 충격적인 영화가 최근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영화 관객이 미국영화로 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안씨는 이어 ‘한류’를 타고 영화가 동남아 등지를 겨냥하며 제작비용이 상승했고, 불법복제와 다운로드로 인해 DVD와 비디오 등 2차 시장이 소멸됐다고 침체의 요인을 분석했다.
“한국영화의 규모를 감안할 때 적정 제작편수는 70편 정도지만, 지난해 110편 이상 개봉되어 흥행의 격차도 극심해졌다”고 그는 설명했다.
소탈한 스타일뿐만 아니라 모범적인 가장으로도 소문난 안씨가 영화를 들고 뉴욕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장남(다빈·20)이 프랫인스티튜트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막내(필립·17)가 최근 프린스턴 인근 기숙사학교 로렌스빌 학교에 입학해 앞으로 더 자주 찾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