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눈길을 안으로 돌리게나,/ 그러면 아직 보지 못한 무수한 고을들/ 그대 마음속에 있나니./ 그 고을 두루 여행하여/ 그대 마음 천문학의/ 전문가가 되라.
-윌리엄 해링턴 '나의 영예로운 친구 나이트경에게'
전공서적이거나 좌우명으로 삼아 머리맡에 두는 경우가 아니라면 한 번 읽은 책을 다시 읽는 일은 드물다. 여행도 그렇다. 가보고 싶은 곳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 보니 두 번 이상 같은 곳을 찾아가는 일이 흔하지는 않다.
그렇더라도 두 번 혹은 그 이상 읽게 되는 책이 있기도 하다. 갔던 여행지를 다시 찾아가기도 한다. 요즘 몇 번 읽었던 책을 또 읽고 다녀온 곳을 또 다녀왔다. 책으로는 헨리 소로(Henry D. Thoreau, 1817~1862)의 '월든'이고 여행지로는 애리조나주에 있는 세도나이다.
꽤 오래 전 두어 번 감동적으로 읽고 서가 깊숙이 꼽아두었는데 요즘 다시 책을 찾아 읽게 되었다. 왠지 모르겠다. 삶이 번잡해진 것 같고 디지털 미디어에 너무 휘둘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부산함 속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뭘까. 어딘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깊은 수면에 들고 싶기도 했는데, 책을 통해 백여 년 전의 처녀림 속으로 들어가 며칠 지내다 온 느낌이 참 좋다.
헨리 소로는 1854년 뉴햄프셔주 콩코드 지방의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만 2년 2개월 홀로 살았다. 오직 삶의 골수를 마시기 위해,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위해 실험적인 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월든'은 그 생활 보고서라고 할 수 있는 시적인 산문이다.
오직 자기 자신과 그리고 자연과의 접촉을 확대시키고자 일상을 물레로 실을 잦듯이 꼼꼼하게 기록했다. 월든은 아주 치밀한 구조로 쓰인 문자로 보는 풍경이다. 베이커 농장이나 월든 호숫가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깊은 지적, 철학적 안목이 토해내는 문장들은 밑줄을 여러 번 긋게 한다. 사람이 인지적 견해를 두루 갖추려면 두 개의 눈을 가져야 되는 것 같다. 하나는 미시적 시각이고 또 하나는 거시적 시각이다. 아주 작은 것도 관찰할 수 있는 곤충의 눈이 필요하고 또 숲을 조망할 수 있는,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깊고 넓은 눈이 있어야 한다. 그는 고독한 산중생활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두루 조망하는 큰 눈을 갖게 된 것 같다.
"자신의 내부에 있는 모든 신대륙과 신세계를 발견하는 콜럼버스가 되라. 그리하여 사상을 위한 새로운 뱃길을 열어라" 라고 후대의 독자에게 권면한다.
세도나는 '기(氣)가 많이 흐르는 땅'이라고 한다. 누군가는 '하늘과 제일 가까운 곳'이라고도 한다. 붉은 바위산이 주는 묘한 신비로움으로 많은 기도자들이 찾는 곳이다. 인디언들의 신성한 땅이었던 그곳에 어쩜 어디서도 얻지 못할 쉼이 있을 수도 있다는 기대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나도 그걸 원했던 것 같다.
바위산을 오르면서 나는 남다르게 기를 느껴보지는 못했지만 붉은 계곡에 신성의 아우라처럼 떠오르던 무지개와 변화무쌍한 운무의 기이함만으로도 속된 기질들을 벗겨내기라도 한 듯 가벼움을 누려보기도 했다. 일출과 석양이 주는 황홀은 타성에 빠져 비적거리는 가슴을 흔들어준다. 풍경으로 읽는 시다.
신성함에 대한 염원을 충족시켜 줄 피안의 땅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세도나 역시 너무 상업화 되어 간다. 그럼에도 의미가 모호한 시 한 구절처럼 바위 능선 저 편 닿을 수 없는 어떤 세계를 지니고 있어 마음의 시야가 흐려지는 막막한 시간이면 찾아가고 싶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