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1 : 얼마 전 몽골에서 잠시 귀국한 이용규 선교사(베스트셀러 기독교서적 '내려놓음'의 저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올해 마흔한 살입니다. 젊더군요. 그런데 그의 지향은 놀라웠죠.
그는 "'나'라는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어져야 한다. 그렇게 '자아'가 죽은 빈 공간에서 예수님이 부활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활시위는 '밖'을 향하지 않더군요. 한치의 오차 없이 '안'을 향했습니다.
이 선교사는 "그렇게 내 안의 집착이 하나씩 죽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저를 만지시는 게 느껴진다"고 말했습니다.
#풍경 2 : 중국에 '석공'이란 사냥꾼이 있었죠. 사슴을 쫓던 그는 마조(709~788)선사의 토굴까지 갔습니다.
마침 휴식을 취하던 마조선사와 마주쳤죠. 석공이 물었습니다. "혹시 이쪽으로 도망가던 사슴을 못 봤습니까?" 마조는 태연하게 되물었죠. "그대는 뭘 하는 사람인가" "보시다시피 사냥꾼입니다" "그럼 활을 잘 쏘겠구먼" "잘 쏘는 편입니다" "그럼 화살 하나로 몇 마리나 잡는가" "한 마리 밖에 잡지 못합니다" "그럼 활을 쏠 줄 모른다고 해야지."
발끈한 석공이 되물었죠. "그럼 스님은 화살 하나로 몇 마리나 잡으십니까" "나는 한 무리를 잡는다네" '옳거니!'하면서 석공이 받아쳤죠. "아니 스님이 어찌 산 생명을 무리로 잡는단 말입니까."
그러자 마조선사가 석공의 가슴을 가리키며 답했죠. "자네는 그런 것까지 알면서 왜 이쪽을 쏘지 못하는가." 석공은 정신이 '번쩍' 들었죠. 그리고 출가해 마조의 제자가 됐습니다.
크리스천이든 불자든 마찬가지죠. 인간은 끊임없이 다가서야 하는 존재입니다. 부처를 향해서 또 예수를 향해서 말입니다.
왜냐고요?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겠죠.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 그래서 부처님은 말씀하셨겠죠. "가자 가자 어서 가자. 깨달음의 세계로."
그런데 두손을 모은 채 "할렐루야!"만 외친다고 '하나'가 되진 않겠죠. 불공을 올리며 "부처님"만 찾는다고 '하나'가 되진 않겠죠. 그럼 어찌할까요. 나와 부처님 나와 예수님 사이의 간격을 봐야겠죠.
우린 활을 들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겨눌 수도 있습니다. 내 안의 무엇이 예수를 가리나 내 안의 무엇이 부처를 가리나.
그게 보일 때 '과녁'도 보입니다. 쉽진 않습니다. 왜일까요? 기나긴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은 '움켜쥐는 방식'에만 익숙할 뿐 '놓아주는 방식'에는 익숙치 않기 때문이죠. 우리의 마음도 그렇고 우리의 몸도 그렇습니다.
그걸 알고 시위를 당겨야겠죠. 단 하나의 화살로 "쿵!"하고 쓰러지는 '자아'는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 쏘고 쏘고 쏘고 또 쏘아야죠.그러다 '퍽!'하고 '자아'가 고꾸라지는 순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절절하게 느껴지겠죠.
'난생 처음 맛보는 생명력 이게 바로 부처의 숨결이구나' '밀물처럼 밀려오는 온유함 이게 바로 주님의 어루만짐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