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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포럼] 미국이 가장 원하는 동지가 되려 했던 박정희

New York

2019.07.05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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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지상 강좌⑦
박정희 대통령은 베트남전쟁 참전을 통해 미국과의 관계에서 대등성을 확보하려 애썼다. 하지만 미국은 미군 명력의 10%를 파병한 대한민국에 전략적, 또 작전상의 발언권을 주는데 극히 인색했다. 1966년 10월 베트남 전선을 찾은 박정희 대통령(앞줄 왼쪽 세 번째).

박정희 대통령은 베트남전쟁 참전을 통해 미국과의 관계에서 대등성을 확보하려 애썼다. 하지만 미국은 미군 명력의 10%를 파병한 대한민국에 전략적, 또 작전상의 발언권을 주는데 극히 인색했다. 1966년 10월 베트남 전선을 찾은 박정희 대통령(앞줄 왼쪽 세 번째).

한국의 첫 전투부대 청룡부대의 환송식 장면.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의 첫 전투부대 청룡부대의 환송식 장면.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 나라의 외교 책임자는 세 가지 철칙을 잊지 말아야 한다. 첫째, 외교는 실력대결에서 얻지 못할 것을 회담을 통해 얻으려는 노력이 아니다. 이 경우 외교가 구걸이 된다. 둘째, 호랑이 등에 올라타 국제 관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면 안 된다. 호랑이 등에서 내려오기도 어렵지만, 내려와서는 호랑이에게 잡혀 먹힐 가능성이 높다. 자주성. 일관성, 지속성이 낮다.



살상의 현장·외교 각축장

그러면 외교는 무엇을 하는 것인가? 세 번째 룰이 답이다. 친구를 원한다면 반려견을 구할 일이다. 동지가 필요하면 반려자를 얻을 일이다. 실리를 취하고 싶다면 외교력을 갖추어야 한다. 외교는 심리적 안정감을 찾는 국가 운영의 영역이 아니다. 국익을 위해 주거니 받거니(quid pro quo)를 생각하고 실행하는 일이다.

군대는 24시간 눈을 똑바로 뜨고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외교부서는 24시간 깊이 생각하는 곳이어야 한다. 상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이며, 내게 절실한 것이 무엇인가를 쉬지 않고 따져봐야 한다. 달리 표현하면 피아의 약점을 도구로 더 강해지는 길을 모색하는 일이 외교다.

베트남 전쟁은 살상의 현장이었지만 외교의 각축장이기도 했다. 이 실리의 싸움터에서 한국은 무엇을 얻었나? 이 질문은 베트남 전쟁에서 벌인 박정희 외교에 대한 성적을 매기는 일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에게 가장 필요한 요소는 옆에서 같이 싸워줄 나라였다. 미국은 베이징과 모스크바의 총지휘를 받는 공산권이 베트남을 필두로 자유세계를 마치 일정 간격으로 줄 세워 놓은 도미노처럼 쓰러뜨리려 한다고 믿었다. 이런 전략적 사고에 부합하는 국제적 공동 전선이 필요했다. 기껏해야 수 천명 후방 지원 부대를 화려한 팡파르와 함께 파견하고, 혈맹인양 자신을 과대 포장하는 나라가 아니라, 말 그대로 정글에서 같이 피를 흘리는 전우가 필요했다. 박정희는 미국의 이 간절함(약점)을 보았다.

한국의 약점 통탄한 지도자

박정희만큼 한국의 약점을 실감하고 통탄한 지도자도 드물다. 군사, 경제, 외교 모든 면에서 '자주'란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 환경을 바꾸는 것이 그가 설정한 실리였다.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박정희 외교에는 세 개의 축이 있었다. 첫째가 군사.경제원조, 둘째가 베트남에서의 수출과 고용 기회, 셋째가 한.미 관계에 있어서의 대등성이었다.

박정희는 세 번째 요소에 많은 공을 들였다. 미국이 가장 원하는 동지가 되어줌으로써, 한.미간의 불균형 관계를 수평적 동맹으로 격상시키고 이를 제도로 묶어두려 했다. 따라서 그는 전폭적이란 표현이 과장되게 들리지 않는 파병으로 미국의 요구에 답했다.

다음은 한국군 베트남 파병을 위해 가장 활발히 한국 정부와 소통한 윈스롭 브라운 대사의 평가다. "미국은 처음 소규모 의료진을 원했고, 이를 확보했다. 그 다음 비전투부대를 요청해 2000명을 받았다. 그리고 1개 전투사단을 요청해 이를 확보했다. 첫 전투 사단 요청 합의서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 두 번째 전투 사단을 요청해 이 또한 결국 받아냈다(We first asked for a small medical unit and got it. Then we asked for non-combat troops and got 2,000. Then we asked for a combat division and got that. Before the ink was dry on the agreement for the first combat division we asked for a second combat division and ultimately got that)." 베트남 전쟁에 관한 한 이처럼 의리 있는 나라는 없다는 평가로 읽힌다.

공포의 대상이 된 한국군

한국군의 전투력 또한 미국을 놀라게 했다. 린든 존슨은 자신의 최측근 해리 맥퍼슨(Harry McPherson)을 1967년 7월에 베트남에 파견한 일이 있었다. 사기 진작을 위한 과장된 승전보에 익숙해 있는 군 관계자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본 그대로 전해줄 민간 보좌관을 보낸 것이다. 맥퍼슨은 한국군의 작전 방식을 세 단어로 압축해 보고했다. 'Slow' 'Harrowing' 그리고 'Effective'였다.

베트남의 한국 군대는 치밀하게 적이 준동하는 지역에 들어가 작전을 폈다. 요란하게 헬리콥터로 날아 들어가 과도한 화력을 이용해 마을을 보란 듯 파괴하고 다시 헬기로 베이스에 돌아오는 속도감 있는 작전이 아니었다, 천천히. 치밀하게 전과를 올리는 작전 방식을 택했다. 이 결과 참혹하게 느껴질 만큼 공포심을 유발한다는 평가였다. 적 또는 적을 지원하는 베트남 민간의 한국군에 대한 극한 두려움은 한국군과의 접전을 피하도록 유발해 작전의 효율성을 높인다는 결론이었다.

이 같은 평가를 긍정적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다. 늦음 밤, 논길 어디에선가 제대로 된 신분증 없이 길을 가다가 한국군과 마주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란 맥퍼슨의 말은 한국군의 작전 지역 내에서의 민간인 피해 가능성이 높음을 암시하고 있다. 사실상 한국군이 자행한 '민간학살' 주장은 한국군이 베트남을 떠난 지 46년이 되는 지금도 계속된다.


이길주 / 버겐커뮤니티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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