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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 최빈국 한국 '전쟁통해 경제재건 실탄'

당시 한국 GNP 60불 '북한에도 크게 뒤져'
전투부대 파병 협상전략 차지철 '반대 쇼'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계획도 이때부터 가속도가 붙는다. 이번 호부터는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을 연재한다. 다만 이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조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 문제와는 무관함을 알려드린다.

건국의 시점을 어디서부터 삼아야 하는가의 논란처럼 건국 60주년의 실질적 의미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논자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가 건국 후 해외 전장에 장병을 파병한 것은 베트남 전쟁 때가 처음이었고 파병의 성격을 규정할 때 6.25 참전에 대한 보은과 자유우방 지원 북한 도발 억제와 국방력 향상이었다.

이와 함께 경제부흥의 발판 마련이라고 했던 만큼 건국 60주년의 의미 속에 월남파병은 분명한 하나의 획을 긋는다고 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1965년 2월 사이공 정부를 돕기 위해 미국의 본격적인 개입으로 확산된 베트남 전쟁은 약 10년에 걸쳐 아시아 여러 나라에 커다란 경제적 변화를 끼쳤다.

그중에 특히 한국은 '월남특수'라는 말까지 만들어내면서 경제재건의 실탄을 마련하고 '한진'이라는 이름 없던 작은 수송업체와 극동 삼환 대림 현대건설 등이 거대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게 해 준 게 사실이다. 베트남 전쟁의 역사적 평가와 별개로 말이다.

1966년 일본 외무성 경제국이 발표한 '베트남 평화의 경제적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대만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홍콩 필리핀 한국 등이 베트남 전쟁으로 GNP가 평균 3% 증가했다.

69년에 발행된 '이코노믹 리포트 오브 프레지던트'는 미국의 특별비 예산이 65년 1억 달러였던 게 1년 만에 58억 달러 4년 후에는 257억 달러로 급팽창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미국의 특별비가 대부분 전쟁 비용으로 사용된 것이겠지만 필연적으로 전쟁 수행을 위한 간접비용이 뒤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은 경제 측면에서 아시아 지역 국가뿐 아니라 세계 전역을 변화시켰다.

실제로 태국 같은 나라는 아시아권에서 최대의 경제적 수혜국이 됐다. 태국은 미국이 월남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모든 전략기지를 제공하면서 반대급부로 상당한 원조를 받아 사회간접시설 정비를 강화했다.

동시에 기지 사용에 따른 비행장 항만 등 미군을 위한 위탁시설까지 포함하는 대규모 건설 수요를 일으켰다. 한국이 최초로 해외건설에 뛰어들어 태국에서 수주했던 현대건설의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이 바로 미국 원조 자금이었다.

물론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필적하는 근대화 무기와 50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투입하면서도 갈수록 희생자가 늘어나고 여론이 악화되자 인도차이나반도에 국한된 지역전쟁으로 성격을 축소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미 엄청난 예산지출로 재정적자 인플레 국제수지 악화 달러가치 하락 등이 겹치면서 베트남 전쟁은 미국 국내 정치에까지 악영향을 미치고 말았다.

그러나 한국은 경기가 호전되면서 집집마다 TV수상기가 보이고 님은 먼 곳에 가 있지만 남편이 보내주는 돈으로 하이힐을 사 신고 미장원이 성업했다. 춤바람이 사회문제화하기도 했으나 '내 집 마련'이라는 관심사가 그때부터 국민 사이에 회자하기 시작할 만큼 '월남 달러' 덕을 톡톡히 누렸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는 말은 한국 정치의 후진성에 대한 비아냥거림이었다.

반면 1955년 10월 유엔 UNKRA(한국재건위원회) 특별조사단장인 메논이 '한국에서 경제재건을 기대한다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보고서를 쓴 것은 경제적 비아냥거림이었다.

메논의 부정적 시각이 아니더라도 유엔에서 한국을 돕기 위해 특별조사단이 내한했던 그 무렵의 실질적인 GNP는 60달러 언저리로 세계 최빈국 상황이었다. 6.25 이후 생산시설 파괴로 외국의 원조가 없으면 생존이 불가할 정도로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외환보유액도 2300만 달러 정도였다.

지금은 어학연수를 위해 입국하는 한국인들에게 억지에 가까운 온갖 비용을 뜯어낼 정도로 추락한 필리핀이지만 55년 무렵만 해도 한국은 필리핀보다 훨씬 못했고 북한도 한국을 앞서고 있었다. 북한은 남침을 계획하면서도 강력한 철권통치 속에서 공업화를 진행시켜 60년 초반에 수출 2억 달러를 달성할 정도였다.

한국도 이승만 정권 때부터 경제개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경제개발 계획을 세운 것은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2년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었으니까 시점으로 보면 북한은 한국보다 10년 앞서 경제개발에 관심을 기울였던 셈이다.

어쨌든 박정희의 경제개발계획은 외자 도입으로 산업화를 이룬다는 것이 핵심이었던 만큼 위험이 수반될 수밖에 없었다. 외자 도입은 해외의 돈을 국내로 가져와 국내 통화량을 증가시키고 결국 인플레이션의 근본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통화 증가만큼의 경제성장을 해야 하고 실질소득을 올려야 한다는 점에서 최빈국 경제개혁은 위험을 껴안고 가야 하는 것이 필연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월남파병은 외화 획득의 절대적 기회가 된다는 점을 놓치지 않은 박정희가 깊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정치권의 논란이 가열됐지만 추진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의 전투부대 파병을 결정하는 3차 파병안 논의는 집권여당인 공화당 내부에서부터 의외의 복병이 나타난다. 의원총회에서였다.

"나는 여당의원이지만 3차 파병동의안이 국회에 상정된다면 분명히 반대할 것입니다. 월남의 권력자와 부자들은 전부 자기 자식들을 외국으로 피난시켜 놓고 군대조차 보내지 않고 있어요! 그래 놓고 원군요청을 한단 말입니까? 자기 나라 특권층 자식들부터 전선에 서게 한 뒤에 외국에 파병을 부탁해도 될까 말까 할 텐데 자기 자식들은 안전지대에서 향락을 즐기게 해 놓고 우리나라 청년들을 나서게 한단 말입니까? 상정 자체가 국민 정서에 맞지 않습니다."

공화당 소장파를 대변하는 국회 국방위 소속 차지철 의원이었다. 물론 박 대통령의 측근인 차 의원이 공개적으로 파병을 반대한 것은 박 대통령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미국과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쇼를 했다는 주장도 있다.〈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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