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방사선 치료를 받으러 간다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가슴 깊숙이서 밀치고 올라오는 슬픔에 휘청대었어요. 기력이 떨어진 당신이 걱정되어서요. 전화를 끊고 무거운 기분으로 일하러 갔습니다. 행사에 참석한 2백명이 넘는 회원들을 맞으면서 평소에 낯익은 많은 사람들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해서 민망했고요.
쿠바의 현 실정과 앞으로의 전망을 열심히 설명하는 초청 강사의 말은 내 속에 들어설 자리가 없었어요. 뒤쪽 의자에 앉은 내 속에는 당신이 꽉 차있었으니까요. 우리가 만나고 사귀었던 긴 세월. 만나서 가졌던 즐거웠던 추억들이 슬그머니 미소도 띠게 했지요.
보통은 영어로 생활하는 우리는 만나면 열심히 한국말로 수다를 떨었지요. 우리가 사는 남부에 대한 관심과 우리가 떠나온 모국의 변화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눴지요. 이곳에 새로 이사온 한인들과 우리 올드타이머들과의 차이 또한 재미있는 화제거리였고요. 당신은 늘 당당하고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매사에 분명한 견해를 말했어요. 그리고 누구에게도 피해가 되지 않고 그저 도움만 되려고 했지요. 사려 깊은 당신 앞에서 나는 좋은 삶의 자세를 배우곤 했어요. 그러나 당신이 평소에 보여준 것처럼 남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암이라는 병, 그것도 15년이나 그 그늘에서 잘 버텨온 당신의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심하게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어요. 전화선을 타고 가늘게 들려온 당신의 목소리에는 평소 같은 밝고 쾌활함이 없었어요. 당신이 힘이 들어서 오래 통화를 못한다며 미안하다고 했을 때, 나는 당황했습니다. 둔기로 뒤통수를 크게 얻어 맞은 기분이었거든요.
당신에 대한 무거운 가슴을 안고 지난 금요일 밤늦게 성당에 갔습니다. 몇 명의 교우들이 조용히 기도를 드리고 있었어요. 나는 앞자리에 갔지요. 자비로우신 주님과 성모님 앞에 당신을 위한 간절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힘들지 않고, 고통 받지 않고 치유되도록 도와주시기를 빌었습니다. 이국생활 외롭고 힘들어도 늘 씩씩했던 당신의 모습을 옆에서 붙잡아 주시라고.
새벽 1시에 성당을 나서니 바람 한 점 없이 쾌청한 날씨였어요. 하늘에 총총한 별들이 말해 주더군요. 삶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어려운 도전들이 밀물처럼 들이 닥치면 거부하지 말고 정면에서 맞서라고요. 비록 힘이 들더라도 당신은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대학서 만난 남편을 따라 이 미국땅으로 옮겨온 당신은 아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며 한국의 얼을 심으려고 노력했잖아요. 은근과 끈기가 당신의 피 속에 흐릅니다.
삶과 죽음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니 우리가 가진 소중한 시간에 서로에게 기쁨이 되고 싶어요. 당신의 우정과 당신이 제게 어떤 의미의 친구였는지 꼭 알려주고 싶어요. 이곳 토박이 친구들과는 다른, 가슴 아릿한 모국을 함께 기억하는 친구. 남부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길동무. 미국에서 산 세월이 너무 오래되어서 어정쩡해져 버린 우리의 정체성을 함께 고민하는 편안한 친구이지요.
캘리포니아의 한 진료소에서 주문 아기를 낳게 해 준다며 선전한답니다. 피부색만 아니라 눈 색갈이나 머리 색까지 원하는 대로 DNA를 조작할 수 있는 과학적 방법이 있답니다. 암을 치료할 수 있는 의료기술도 곧 발달 될 겁니다. 그때까지 강건한 마음으로 강건한 신체를 위해 당신의 의지를 부추깁니다. 주말에 봄 채소 씨를 뒷밭에 뿌렸습니다. 올해도 이 채소를 키워서 가질 비빔밥 파티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도 그분께 맡기세요. 그리고 주먹을 꼬옥 잡고 용기를 내어서 치료를 잘 받으세요. 당신을 사랑하는 친지들이 주위에 많음을 잊지 말고요. 당신을 위한 우리들의 기도가 들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