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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흑인 윌리와 렌터카

어릴 적부터 나는 순진하다는 말을 많이 듣고 살아왔다. 사실은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순진한 게 아니라 바보에 푼수다.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면 히히 웃으며 곧이곧대로 믿는다. 상대방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분별력이 없어 사리판단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속임의 대상이 되고,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고, 사기를 당하기 일쑤다. 오죽하면 오빠가 “바보는 고칠 수도 없는 병이다. 죽어야 낫는다”고 말하곤 했다.

얼마 전 베벌리힐스 인근으로 이사한 친구네 집을 찾아가다 길가에 주차한 차를 들이받아 사고를 냈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견인차가 내 곁에 멈춰 섰다. 얼른 보기에 사람 좋게 생긴 덩치 큰 흑인이 견인차에서 내려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땡볕에서 사고처리를 하느라고 땀을 흘리고 있는 내게 양산을 받쳐 주었다. 이름이 윌리라고 했다. 그는 자기가 다 해결해 줄 테니 아무 걱정 말고 자기에게 맡기라고 했다.

그는 아주 좋은 바디숍이 근처에 있다며 인근에 있는 바디숍으로 내 차를 견인해갔다. 자기가 파트너십으로 일하는 곳이라고 했다. 얼른 보기에 깨끗하고 그곳에 있는 차들이 다 고급차들이라 차를 안심하고 맡겨도 될 성싶었다. 그곳에 차를 맡긴 후 윌리는 근처에 있는 렌터카 회사로 나를 데려 가서 차도 빌려주었다. 일사천리로 일을 끝마친 윌리가 잇몸을 드러내고 씩 웃으며 다 잘 될 거라고 했다.

며칠 후 바디숍으로부터 차를 다 고쳤으니 가져가라는 전화를 받고 가보니 윌리가 내 차를 길가에 세워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내 차 키를 건네주며 렌터카는 자기가 돌려줄 터이니 나는 고친 내 차를 몰고 가라고 했다. 친절하고 고마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왔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후 편지 한통을 받았다. 내가 렌트했던 차가 유료도로를 패스도 없이 통과하는 장면이 찍힌 통지서였다. “어떻게 된 일이지?”라며 알아보려는 차에 이번엔 주차 위반 통지서가 연달아 두 개나 날아왔다. 위반 날짜를 보니 모두가 다 렌터카를 돌려준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

알고 보니 윌리가 내 이름으로 빌린 차를 돌려주지 않고 자기가 계속 몰고 다니면서 저지른 일들이었다. 단 시일에 그렇게 많은 티켓을 받은 것을 보면 아마도 음주운전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윌리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따지니 그는 “아무 걱정 말라”며 자기가 지금 벌금을 내려고 와 있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아무 걱정 말라 하기에 그 일들은 잊고 지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길가에 차를 세워 놓고 동네 커뮤니티센터에서 운동하는 동안 누가 내 차 뒤를 박아서 범퍼를 찌그러트려 놓았다. 바디숍에 차를 맡기고 렌터카 회사에 갔다. 직원이 컴퓨터를 보며 내가 먼저 빌려간 차를 아직 돌려주지 못한 상태라 차를 빌려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 카드에서 벌써 3천 몇 백 불이 빠져나갔다는 것이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아니, 차를 돌려준 지가 언제인데! 놀라서 윌리에게 전화했더니 그는 또 “아무 걱정 말라” 라면서 그 차가 사고가 나서 고치느라고 아직 돌려주지 못했다고 했다. ‘아무 걱정 말라’는 말이 그의 입에 붙은 듯했다. 어라! 이번엔 사고까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더니 그때부터 부랴부랴 더 이상 렌터카 회사에서 돈을 빼 가지 못하도록 신용카드를 바꾸고 주차단속 기관을 찾아가서 신고하는 등 정신없이 바쁘게 지냈다. 윌리는 자기의 잘못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또 “아무 걱정 말라”면서 렌터카 회사에서 빼 간 돈은 자기가 모두 다 갚아주겠다고 날짜와 시간까지 약속했다. 그것도 현찰로 지불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 거짓말로 나를 농락했다. 그는 거짓말의 달인이었다. 그 순간만 모면하려고 거짓말을 하는 거다. 그에게서는 양심이나 일말의 죄책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사건을 수습하느라고 한동안 무진 애를 먹었다. 스트레스 받고 약이 오르고 억울해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아무나 붙잡고 윌리라는 흑인이 어쩌구 저쩌구, 참 나쁜 놈이라며 흥분해서 욕을 하고 다녔다. 심지어는 흑인을 조심해야 한다느니 그런 놈 때문에 선량한 흑인들까지 욕을 먹는다는 등 열변을 토했다. 그렇게 실컷 욕을 하고 나니까 분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시일이 지나 마음의 평정을 되찾으니 그제서야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가 있었다. 후회가 밀려왔다. 렌트 한 차를 내가 직접 돌려주고 내 차 키를 직접 받았어야 했는데…. 바보짓을 한 건 난데 누구를 탓하고 있지? 심리학 용어로 잘되면 내 탓, 안 되면 네 탓이라고 사고하는 방식을 ‘베네펙턴스’ 현상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Benefit’과 ‘effect’가 합성이 되어서 만들어진 용어다. 실제와 달리 그 때 차사고가 깔끔하게 잘 해결되었더라면 그가 흑인이라는 선입관없이 그에게 사고 뒤처리를 맡긴 내가 잘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일이 잘못되자 ‘역시 흑인은 나쁜 놈’이라며 그를 탓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윌리와 버디숍과 렌터카 회사는 한 통속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윌리가 길에서 사고 난 차를 견인해서 바디숍으로 데려가고 그 후엔 렌터카 회사도 알선했던 것이다. 그래서 렌터카 회사에서 내 키를 그에게 내어줄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 내가 똑똑하게 일처리를 했더라면 윌리도 나쁜 마음을 먹지 않았을 것이고 사고도 내지 않았을 것이다. 내 잘못으로 그에게 악을 행할 기회를 줬으니 그를 나쁜 사람으로 만든 것은 나다. 그렇게 생각하니 윌리에게 오히려 미안한 생각까지 들었다.

앞으로 그런 바보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하겠다고 다짐해보지만 ‘바보는 죽어야 낫는다’는 오빠의 말이 자꾸 걸린다. 그런데 윌리는 내가 바보인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내 얼굴에 바보라고 써 있나?


배광자 / 수필가·글사랑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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