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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자 가장으로 산다는 것

Los Angeles

2009.03.29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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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거세 당한 기분 들지만
최악의 경험이라고 인정하긴 싫다'
요즘 나의 하루 일과는 오전 7시45분에 시작된다. 여덟 살짜리 딸이 방문을 박차고 들어와 침실 스탠드 조명의 구슬 달린 줄을 잡아당기며 소리친다. “아빠, 일어나!” 그 소리에 벌떡 몸을 일으킨 뒤 이를 닦고 머리를 빗질한다. 샤워는 할 때도 있고 안 할 때도 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얼른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세 딸을 차에 태워 학교로 향한다. 아침마다 반복되는 일상이다. 동네 초등학교 앞에 조심스럽게 차를 멈춘다. 첫 번째 목적지다. 이 일을 한 지 여러 달이 됐지만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수많은 SUV(스포츠다목적차량)와 미니밴이 들어오고 나간다.

마치 상자 로봇들이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을 하는 것 같다. 자동차 사이로 엄마들이 아이들 손을 잡고 나와 학교로 향한다. 개를 데리고 나온 사람도 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이들도 있고 무단 횡단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 같은 아저씨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이 모든 광경이 나를 움츠러들게 한다.

이런 혼란에 적용되는 나름의 예의가 있겠지만 나는 전혀 모르겠다. 너무 천천히 차를 모나? 아니, 너무 빠른가? 여기 차를 대도 되나? 저 아줌마가 방금 나를 째려봤나? 얼마 동안 차를 세워둬도 괜찮나? 빈자리를 찾아 차를 세우자 큰딸들이 뛰어 내린다. 뽀뽀, 뽀뽀, 빠이, 빠이. 소형 은행 금고만 한 배낭을 맨 어깨가 힘겨워 보인다.

가방 무게를 버티려 몸을 앞으로 기울인 자세로 걷는다. 공부 잘해라. 넘어지지 말고. 차를 빼기 시작할 때 또 다른 차가 옆에 멈춰 선다. 운전석에 앉은 아줌마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내가 나가면 그 자리에 차를 댈 요량인가 보다. 다른 두 명의 아줌마도 나를 곁눈질한다. 나의 자의식이 고개를 쳐든다.

“그래, 수염도 안 깎은 아저씨가 차를 몰고 나왔다. 그래, 회사에 안 다닌다!”는 외침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다. 지난해 추수감사절(11월 넷째 목요일) 전 주, 다니던 뉴욕의 대형 투자은행에서 밀려났다. 내가 사는 곳은 월스트리트 종사자들이 몰려 사는 교외지역이다. 월스트리트는 여기저기 셔터 문을 내리지만 그래도 세상은 돌아가고 아이들은 여전히 학교에 다닌다.

아이들을 모두 등교시킨 뒤 헬스클럽에나 갈까 잠시 고민한다. 그곳에서 항상 만나는 남자들이 있다. 돈을 벌 만큼 벌어 더 일하지 않아도 되는 ‘자발적 퇴직자’들인가? 아니면 나처럼 실업자들인가? 가족의 생계를 전담하는 가장으로서 실직 후 뭐랄까 다소 거세당한 기분이다.

아내는 아이들을 뒷바라지하는 후원자로, 동네 교육재단의 재무담당으로, 다가오는 학교 연극공연의 안무가로 지칠 줄 모르고 뛰어다닌다. 모두 자원봉사 활동이다. 가족의 생활비를 대고 아이들 대학 학자금을 마련하는 일은 여전히 내 책임이다. 시대에 뒤떨어진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자꾸 그런 생각이 떠오르니 어쩌랴. 시내에서 만나는 아줌마들 중에도 분명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남자가 왜 회사에 나가지 않느냐고. 거기에 생각이 미치면 어깨가 좀 더 처지고 발걸음에 힘이 빠진다. 나는 남부러울 게 없는 사내지만 때로는 거세당한 귀여운 애완동물 같다는 느낌이 든다. 옷에 주홍글씨로 실업자를 뜻하는 ‘U’자를 큼지막하게 박아 넣어 다른 사람들이 궁금해 하지 않도록 할까도 생각 중이다.

하교하는 아이들을 마중하러 갔을 때 안면이 있는 어떤 아줌마가 나를 보더니 무심코 물었다. “저런, 애 아빠도 실업자가 된 거유?” “예, 직장을 잃었죠.” 내가 대답했다. 금융 서비스 업종이 된서리를 맞아서, 어쩌구저쩌구…. 날이 바뀌어도 사람들은 똑같은 표정으로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나는 똑같은 변명을 늘어놓겠지.

최근 동네 주유소에 들렀다가 주인과 대화를 나눌 때의 일이다. “에이, 당신네 월스트리트 사람들은 그래도 돈을 벌었잖아.” 그가 말했다. 천만의 말씀, 누구나 그렇지는 않다. 나는 마케팅 담당자였고 지원팀 직원, 고객 서비스 담당자, 경비원들과 함께 해고당했다. 월스트리트든 굴뚝산업이든, 회사가 어려워지면 소득액과는 상관없이 누구나 타격을 받게 마련이다.

그래도 내가 특별히 동정심을 유발할 만한 처지가 아니라는 점은 잘 안다. 직장만 없을 뿐 아내와 세 자녀가 있고 좋은 동네에 좋은 집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어려움을 극복해 낼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많다. 다만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나만 뒤처진다는 느낌을 떨쳐버리기 힘들 뿐이다.

화요일에는 침울하다가 수요일에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어쩌면 다음 주에는 거꾸로 할지도 모른다. 실업이 내 인생에서 최악의 경험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어떻게든 피하도록 권하고 싶다. 내 나이 50이다.

금융서비스 업종의 취직이 힘든 정도가 아니라 취업문이 아예 닫혔는지도 모른다. 미국 경제는 부진에 허덕인다. 하지만 결국 모두 해피엔딩을 맞으리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렇게 되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말하려는 요지가 뭐냐고? 직장을 잃어 기분이 개떡 같다면 당신만 그렇지 않다는 얘기다. 그리고 아줌마들에게도 한마디, 아이를 학교에 내려주려고 차 안에서 차례를 기다릴 동안, 면도하지 않은 얼굴에 야구모자를 쓴 아저씨를 보면 미소를 지으면서 손이라도 흔들어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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