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는 목장 일을 도와주면 좋겠다는 리차드의 부탁이 있었다. 목장에서 오늘 할 일은 아스파라거스 밭과 라즈베리밭, 그리고 꽃밭 정리였다. 첫째 내외가 아스파라거스 밭과 화단 정리를 맡았고, 막내와 리차드 몫은 라즈베리밭이었다. 나는 감독자로서 밭 중간쯤에 앉아 돕고 싶으면 돕고, 그냥 책을 읽거나, 암튼 하고 싶은대로 하라며 의자까지 내 다 주었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첫째 내외는 일도 시원시원하게 잘한다. 키 큰 아스파라거스 묵은 가지들 쳐내는 일을 점심 먹기 전에 후딱 끝내고, 오후엔 라벤더 밭과 그 옆의 큰 꽃밭까지 모두 정리했다.
막내와 리차드가 맡은 라즈베리밭은 일이 많았다. 나는 그저 나무만 심어 놓으면 저절로 자라서 열매 맺고 하는 줄 알았다. 생각보다 일이 많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다. 키 큰 오래된 가지들을 잘라내면 그 바닥에 쌓인 불필요한 잡동사니들을 다 청소해주고, 여기저기 수도 없이 깊은 뿌리를 박고 있는 민들레도 제거해주어야 한다. 리차드가 가지를 쳐내면 나는 그 이랑을 청소하고, 그러면 막내가 민들레와 잡초를 뽑았다. 막내는 워낙 채소 가꿔 먹는 걸 좋아하고 일을 무서워하지 않은 성격이라 부지런한 리차드와 손이 척척 맞는다. 일하는 막내를 보면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니라 농부의 아낙 같다. 햇볕이 강한 몬태나에 살아 얼굴이 검게 타서 더 그렇다.
첨엔 쉬려고 했으나 일하는 그들을 보고 있으려니 멋쩍기 짝이 없어 결국 일어났다. 일하는 두 커플에게 물과 티를 번갈아 배달하다가 막내가 하는 라즈베리 바닥 정리를 한 고랑을 도와주었다. 점심 후에도 슬그머니 나가 고랑 두 개를 더 도와주고는 더는 계속하지 못했다. 다음 날 나머지 고랑을 다 마쳤다. 쪼그리고 앉아 밭이랑을 정리했더니 다리가 천근만근이다. 문득 한국서 농사짓는 분들이 밭일할 때 깔고 앉는 딱 북처럼 생긴 동근 의자가 생각난다. 언제고 서울 가면 몇 개 사와야겠다.
신기한 게 밭일을 하면 몸은 몹시 힘든데, 하고 나면 몸을 쓴 뒤에 느끼는 특별한 희열이 있다. 다음 날 일어나서도 몸이 거뜬했다. 몬태나에 피난 아닌 피난을 와서 오랜만에 밭일하고 나니 새삼 우리가 살기 위해 먹어야 하는 먹거리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다. 막내도 집 한쪽 마당에 밭을 만들고 해마다 채소들을 심어 그것 따다 먹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코로나 사태로 인해 내가 꼭 필요한 채소가 그로서리에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보니 그 작은 텃밭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코로나 사태로 인한 사회적 격리는 가족들을 한 공간에서 지내지 않으면 안 되게 해주었다. 덕분에 가족들은 이 기회에 가족의 의미와 가족애의 가치에 대해 재고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텃밭의 효용성에 대해 좋았던 시절의 옛 풍속을 되새김질해본다. 우리 어릴 땐 모든 작물이 유기농 아닌 것이 없었다. 열무를 밭에서 뽑아 금방 겉절이를 만들어도 줄기가 달큰했고, 참외도 무슨 종류든 꿀맛이었다. 목장에서 나는 계란은 노른자도 색깔이 샛노랗고, 맛도 여간 고소하지 않다. 이런 모든 일상의 사소한 가치들을 일깨워준 건 이번 코로나 사태의 덕분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고통의 시간인 이 시간이 결코 헛된 시간만은 아니다. 비록 하루 일꾼이었지만, 그 체험을 통해 내가 흘린 땀에서 희망의 나팔 소리를 또 한 번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