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1] 조중훈 회장 '펜타곤 직접 가 계약땄지'
50년대 수송 하며 사귄 미군 장교들 큰 도움
"한국군 파병하니 용역달라" 하니 단숨에 OK
65년 10월부터 본격화되는 청룡과 맹호의 전투부대 파병이 시작되면서 마땅한 세계 수출시장을 갖지 못했던 정부가 그나마 믿는 시장은 월남이었고 66년 국가의 수출 총 목표액으로 잡은 것이 2억5000만 달러였다.
이 목표액을 달성해보려고 정부는 강력한 '수출진흥정책'을 뒷받침하기까지 했다. 2억5000만 달러를 벌기 위해 정부가 총력을 기울였다는 얘기다. 지금은 웬만한 중소기업 하나만 해도 2억5000만 달러 수출을 하지만 그런 정도가 60년대 한국의 경제 체력이었던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한진의 월남 진출 계획은 성사만 된다면 더없는 기회였다. 이미 조중훈 회장(당시 사장)의 눈에는 황금을 캘 수 있는 광맥이 월남에 있다는 것이 보였다니까 일찌감치 혜안을 가진 셈이었다. 조 회장은 채명신 사령관이 지휘하는 맹호사단이 전부 천막에서 지내고 있더라면서 회고를 계속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다가 도착해서 다시 퀴논 항에 가보니까 부대로 수송이 안 된 짐들이 산더미같이 쌓여있어요. 사람이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그러니 미군 입장에서는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그게 전부 전쟁물자인데. 장병들에게 지급할 보급품도 전쟁물자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첫눈에 이건 금광이다 그래가지고 귀국 후에 정부에도 얘기하고 동생(조중건)을 보내고 그랬지요."
-월남을 방문하시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파병을 한다고 난리를 칠 때지요. 내 입장에서는 가기만 하면 뭘 합니까. 실리가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 사업 차원에서. 근데 전쟁하고 수송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만 알고 있는 정보가 있어야지.
파병은 하는데 전쟁이 어떻게 언제까지 갈 건지 그런 정보를 알아야 할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월남을 가기 전에 먼저 미국을 갔어. 그때가 65년 8월이에요. 내가 57년부터 미군 수송을 했거든?
말하자면 한국에서 개척을 한 거지요. 미군 수송을 한국 업자가 맡은 것은 우리가 최초니까. 그러니 수송 장교들 고급장교들 다 알기 때문에 미국 펜타곤(미 국방부 본부건물)을 두드렸어요. 아니나 달라 전부 아는 얼굴들이야."
-한국에서 그렇게 많은 간부와 사귀셨습니까.
"껄껄. 내가 어째서 고급장교들을 많이 알게 됐느냐 우리가 수송을 하면서 미군을 접촉할 때만 해도 미군 장교들이 한국 사람을 생각할 때 남자는 전부 도둑놈이고 여자는 '양갈보' '양부인'이고 집은 '하꼬방'이라는 시각으로 봤어요.
50년대 초기에는 다 그랬습니다. 미군과 얘기를 해보면 그때는 한국 사업가들이 지프를 타면 최고였는데 그들의 시각에서는 저것도 도둑질한 지프 타고 다닌다 이거예요. 내놓고 말은 안 하지만 그 사람들 선입관이 그랬어요. 불쾌하지. 그래서 나는 57년에 벤츠를 타고 다닌 거예요.
심리적으로 미군들 사고방식을 눌러가면서 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지요. 그러니까 나를 다시 보는 거야. 그때부터 백만장자가 아니더라도 백만장자의 매너를 가져야 되겠다 하는 게 내 사고방식이 됐어요. 왜 미국이 알다시피 자본주의 국가인데 백만장자라면 우러러보거든.
집에 와서 봤을 때도 돌멩이로 근사하게 꾸며놓고 정원이 넓고 하면 할리우드 배우 집은 아니지만 꺼벅 죽거든 껄껄껄. 8군 장교니 뭐니 내가 대접도 받아봤지만 집으로 초대도 많이 했어요. 대접을 받으면 해야 되잖아요.
특히 고국으로 돌아가는 장교들 일이 끝나고 본부로 귀대하는 사람들을 많이 초청했어요. 그러면서 임무 끝나고 가니까 네 와이프한테 주라고 선물도 꼭 했고. 그렇게 10여 년 가까이 한 5000명을 초대했지요.
그러니 친구가 많을 수밖에. 펜타곤에 가보니까 수송 장교들은 전부 반갑게 환호하고 어쩐 일로 왔느냐고 묻고 전부 우리 편이야 껄껄껄."
사업하는 입장에서는 특히 미군의 파워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업가가 아니더라도 구조적으로나 외교적으로 미국 경제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돼있던 것이 당시 한국의 경제 형편이라는 것은 누구나 느끼는 일이었다. 유감스럽지만 지금도 한국 경제는 미국의 영향권을 벗어나서 독자적인 행보를 하기는 어렵게 돼 있다.
무역적자와 흑자의 향방이 달러 가치와 원유가 미국의 성장률 그리고 미국 산업의 경쟁력에 따라 달라지게 되어 있으니 도리가 없는 것이다. 지금도 그러한데 월남이 미국에 의존해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더구나 미국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는 한국의 수송업자로서는 월남에 진출할 수 있는 지렛대를 펜타곤에서 얻게 된다면 여간 큰 후원 세력을 등에 업는 게 아닌 셈이었다.
조 회장은 펜타곤에서 지원 약속을 받으면 무리하지 않고도 시동을 걸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물론 덩치가 큰 만큼 추진하기가 만만한 일은 아니었고 정부 협조 없이는 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했다. 당시 상황을 조 회장은 인터뷰에서 솔직하게 털어냈다.
지금의 잣대로 보면 한진이 정부 특혜를 입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수출진흥에 정부가 총력을 쏟은 그때는 그런 큰 수송사업을 할 수 있는 업체가 한진 외에는 없었다. 이 때문에 오히려 외화벌이의 첨병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사귀었던 장교들을 펜타곤에서 만났을 때 월남에서도 한진의 역할이 있다는 걸 인식시켰습니까?
"당연히 얘기를 했지요. 정보를 얻겠다고 갔지만 한국에 있을 때 친하게 지냈던 사람 대부분이 수송 담당 고급장 교들이고 그 사람들을 만났으니까 내가 얘기를 안 해도 왜 왔는지 알았을 거예요.
그만큼 친하게 지냈고. 미군이 그때 한 200만인데 고급 수송 장교라는 건 국한되어 있잖아요. 진급을 했어도 병과를 바꾸지 않으니까 여전히 수송 담당이고. 그러니 다 알지. 그래서 내가 한국군이 파병 가는데 우리가 수송을 하고 싶다. 우리한테 용역을 줄 수 있겠느냐? 그랬더니 '슈어(Sure)' 하면서 아주 쉽게
답이 나온 겁니다. 그래서 직접 월남을 둘러보러 간 거예요."〈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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