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틀랜타 한인사회 발전과 함께 성장해 온 팬 아시안 커뮤니티 센터(CPACS, 구 한인 봉사센터). 지난 1980년 애틀랜타 한인 연합장로교회 소속의 봉사센터가 30여년이 흐른 지금 미국내 아시안 커뮤니티를 위한 '봉사센터'가 되기 까지 그 중심에는 김채원 총무(사진)가 있었다.
"봉사센터는 소아과 의사인 김현학, 루스김 부부가 맡아 세웠어요. 이후 교회에서 분리시켜 한인들을 위한 봉사를 계속 해 나갔죠. 그러다가 남편이 지금의 팬 아시안 커뮤니티 센터의 이사장을 맡으면서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1989년 남편을 도울 겸 3개월간 봉사센터에서 비서로 발을 들여놓은 김채원씨는 "당시 봉사센터의 전 재산은 책상 하나와 철제의자 2개, 케비닛 1개, 장부와 280달러의 돈이 전부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일단 봉사센터가 한인들을 위해 제대로 돌아가려면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제가 봉사센터에서 일하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비용이 모두 이사들 주머니에서 나왔어요. 그러니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데 당연히 어려움이 있죠. 게다가 그 전까지는 하루종일 사무실에 앉아서 사람들에게 오는 전화를 받았어요. 전화 안오면 그냥 가만히 앉아있는 거에요."
결국 발로 직접 뛰기로 했다. 가만히 앉아서 돈 줄 것만 기다리다가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각 법원에 편지를 써서 한인 통역자가 필요하면 부르라고 했다. 영어번역, 이민서류도 맡아하고 소정의 수수료만 부담했다.
정식 간호사(RN) 출신인 김 총무. 하지만 당시 비즈니스를 운영하면서 더 이상 간호사 일을 하지 않고 있어 이미 자격증이 소멸된 상태였다.
"다시 RN 자격증을 취득했어요. 센터에서 혈액검사, 예방접종을 해주기 위해서였죠."
3개월 동안만 임시로 남편을 도와줄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한 번 불붙은 열정이 쉽게 꺼지지 않았다. 센터에서 일하면서 김 총무는 자신이 생각했던 미국속의 한인들의 삶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한마디로 '쇼크'였다. 어렵게 살고 있는 한인들도 많았고, 미국내에서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아인의 위상은 없었다.
"물론 어려운 분들을 도와드릴 때, 작은 것에도 감동 받는 모습을 보면 보람을 느끼지만 미국 속에 사는 소수민족으로서 나의 권리를 찾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껴요."
그 당시 김 총무의 세계는 가정과 아이, 운영하던 비즈니스 였다. 하지만 봉사센터에서 일하면서 미국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결국 하던 비즈니스를 접고 봉사센터에 매달기로 했다.
"1992년 우연히 비영리 단체인 라티노 협회를 둘러보게 되었어요. 규모 뿐 아니라 시스템 자체가 상당히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어요. 그들도 이민자로 우리와 똑같은 어려움들을 겪고 있었고, 협회에서 그들을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유태인 협회등을 돌며 '공부'를 시작했죠."
'롤모델'을 찾았고, 협회들 대부분이 정부와 주정부, 카운티 정부로 부터 프로그램별로 일정액의 지원금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지원금을 요청한다고 해서 누구나 다 받을 수는 없다.
카운티면 카운티, 주정부면 주정부, 연방정부에 신청서를 내고 다른 비영리 단체들과의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만 한다.
기금마련을 위해 6년을 돌아다녔다. 주류사회에서 열리는 주요 미팅은 다 돌아다녔고, 펀딩 조성을 위해 작성한 지원서는 셀 수 없다. 그렇게 무보수로 봉사센터에 '올인' 한 것이 6년. 약 6만달러의 돈이 모였고, 1997년 처음으로 정식 사회 복시자를 채용했다. 봉사센터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또 한인들 뿐 아니라 중국, 베트남 등 다른 아시아인들 역시 봉사센터에 도움을 요청했다.
"결국 1997년 봉사센터의 이름을 '팬 아시안 커뮤니티 센터'로 바꾸게 되었어요."
10여년만에 정식직원은 50명으로 불어났다. 이제는 사무실에 앉을 공간이 없어 곤란한 지경이다.
센터내 모든 것을 전문 사회 복지사에 맡길 수는 없었다. 결국 지난 2001년 조지아주립대학에서 사회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의 나이 쉰이었다. 당시 스무살이던 막내 아들과 함께 나란히 대학 신입생이 된 것.
"결국 6년만에 학업을 마치고 사회학 학사를 취득했어요. 참 긴 여정이였죠. 그렇게 공부를 하고 나니 이해 못했던 '사회'를 좀 알겠더라고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많은 한인들이 DUI에 적발되어 전문 카운셀링 프로그램을 받아야 하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아 비싼 돈을 들이고도 효과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문 카운셀러가 되기로 결심. 2003년에는 조지아 애딕션 카운셀러(Addiction Counselor)에 도전해 두번의 낙방끝에 세번째에 합격했다.
김 총무는 요즘 미국내 한인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의 권리를 찾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건강박람회에 가도 한국인은 고사하고 아시아인들은 '아더스(Others)'로 분류가 되어 있어요. 이게 무슨 일입니까. 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2세 3세 한인 직원들이 그것을 보고 우리가 바꿔야 한다고 해요. 우리는 더이상 미국에서 '아더스'가 아닙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시아인의 데이터를 축척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많은 아시아인들이 센서스 조사에 참여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국 사회에 아시안 커뮤니티를 위한 보조금을 요청할 때도 그들에게 보여줄 공신력있는 데이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숫자가 없으니 미국사회에서 아시아인들은 그냥 무시를 당하는 것이다.
또 김 총무는 미국 주류사회에 우리의 권리를 외치고 필요한 것을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고 했다.
"지금 귀넷카운티에 거주하는 한인인구가 자그마치 8%입니다. 절대 적은 숫자가 아니죠. 하지만 공공기관을 가보세요. 이중언어를 구사하는 한인 직원이 있는지, 서류, 안내문 한장 한국어로 되어 있는 것이 없어요. 지금 귀넷 카운티 예산 중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 책정된 것은 단 한 푼도 없습니다."
김 총무가 각종 미팅에 참여해 미국인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 '한국인들은 사진 한번만 찍어주면 된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의 인상에 한국인들은 행사에 미국 인사들 초청해 놓고 함께 사진만 몇장 찍어주면 한인들은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생각이 짙게 배어 있어요. 같이 사진 찍는다고 해서 그들과 같은 동급이 되는 것은 아니죠. 보여주기식의 행사보다는 내실을 기해야 합니다."
김 총무에게 힘이 되는 것은 센터를 위해 힘을 보태주는 지역 한인들과 단체들이다. 경기불황속에서도 남을 돕겠다고 큰 돈을 내놓는 스폰서부터, 센터를 이용한 후 고맙다고 지역사회를 위해 써달라며 5달러, 10달러 내놓는 노인들의 손길에 다시 용기를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