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띠는 북한말로 브래지어를 뜻한다. 날씨가 더워지니 노출이 심한 옷차림을 자주 볼 수 있다. 다민족이 모여 사는 뉴욕지역은 특히 남미에서 온 여인들의 옷차림이 심하게 아슬아슬하다. 아담과 하와가 언제부터 옷을 챙겨 입기 시작하였는지 모르지만 지금도 유방을 드러내고 사는 아프리카의 어느 종족들은 아담과 하와의 전통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순수한 종족이지 미개인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문명인이라고 자처하는 백인들의 나체촌이 지구 곳곳에 있는 걸 보면 옷을 걸치지 않고 생활하는 것을 야만(野蠻)이라고 깎아내릴 일은 아니다.
한말(韓末) 서양인들이 사진기를 들고 조선에 들어와 찍은 사진 중에는 저고리 도련이 짧은 탓에 유방이 드러난 조선 시대의 여인을 흔히 볼 수 있다. 그 전쟁 통의 사진들을 보면 어린 소녀부터 성인까지 지금처럼 양장한 여성은 볼 수 없다. 여인들은 노소를 막론하고 치마저고리이고 남성들은 흰 바지저고리에 잘 차려입으려면 한복 위에 흰색 두루마기를 입으면 정장이 되었다. 먹거리, 입을 것이 귀한 각박한 전시(戰時)에는 미국에서 보내 준 구호물자 속의 서양 옷이 일본강점기 해외에서 서양문물을 접한 개화된 신여성들을 제외하고는 한국의 양장의 대중화 시초였다.
나의 나이 대여섯 살 철이 들 나이 때쯤 일찍이 동경유학 중인 가형(家兄)께서 여름방학 때 집에 돌아와 일본식 속옷인 ‘훈도시’라는 것으로 남성의 치부만 가리는 것을 차고 있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스모선수들도 입는 옷이지만 일본 풍속 사진을 보면 남성 여성 공히 훈도시를 걸치고 민속행사에 나온 장면을 볼 수 있다. 여성들의 비키니 수영복보다 더 야한 모양이다. 복식문화가 나라마다 특이하여 관광 소재가 되나 보다.
치마저고리만 입고 자라온 옛날의 누나들이 6·25 전쟁 중 교회에서 나누어 준 구제물자의 서양 옷을 얻어 들고 와 집에서 입어보며 까르륵대던 일이 어언 70년 전 일이다. 나도 이제는 사이즈가 맞지 않거나 유행이 지난 아직도 성성한 옷은 동네 마켓의헌 옷 수거함에 세탁 후 넣는다. 아마도 어느 자선기관에서 수거한 헌 옷들은 재난을 당한 세계 어느 곳으로 보내질 것이다. 작은 액수이지만 DAV(상이 재향 군인회), 적십자, 타운 소방서, 경찰서 등에서 도네이션 편지가 오면 외면할 수가 없다. 소액이라도 기부(寄附)를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 미국생활인가 보다.
어려운 시기를 견디며 살아온 한국 여성들의 강인함은 높이 평하여 주어야 한다. 등에는 젖먹이를 둘러업고 머리 위에 똬리를 얹고 그 위에 물동이를 이고 골목길을 걷는 여인들의 출렁대는 젖가슴을 보고 당시에는 야하다고 하지 않았다. 일상의 풍경이었다. 등에 업은 어린애가 울면 앞으로 돌려 바로 젖을 물리는 간편한 동작을 누가 선정적이라고 할 것인가. 지금쯤 이런 복장으로 거리에 나선다면 경범죄로 입건 당하기에 십상이다. 남성들은 상의를 벗고서 당당히 해수욕도 하고 대로에서 조깅하지만 여성들은 가슴이 시원한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남성 위주의 사회가 아직도 위력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모르겠다. 세상이 무섭게 변하는 시대이니 부계(父系)사회가 변하여 모계(母系)사회로 돌변하면 여성들이 ‘가슴 띠’ 없이 웃옷을 벗고 활개 치는 여인상을 볼 수 있는 세상이 올 수도 있을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