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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4] 편도티켓 들고 죽을 각오로 떠나

미포병학교 출신 '찰리 조' 조중건 월남행
미군 사령관 교섭 특명…한국군과도 친해

마침내 한진은 조중건 상무를 앞세워 월남으로 향한다. 앞서 언급했듯 조중훈 회장이 45년 11월 '한진상사'를 창업했지만 그 전에는 자동차 피스톤을 재생해 판매하던 '이연공업사'라는 소규모 공장을 운영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으로 패색이 짙어가던 일본이 모든 산업시설을 군수지원 체제로 묶었고 조 회장도 피스톤 수리공장을 닫아야 했다.

그 후 해방과 함께 한진상사를 만들어 무역업과 수송사업으로 성장했지만 그래도 급성장의 무대는 월남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현장을 지휘하는 미군 사령관들을 만나 교섭하는 것은 조중건 상무의 몫이었다. 그는 66년 1월 23일 왕복 티켓도 아닌 편도(출발) 티켓만 손에 쥐고 성공하지 못하면 월남에서 죽는다는 각오로 떠나는 것이다.

친화력이 뛰어난 조중건 대한항공 전 부회장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형(조중훈)이 다져놓은 바탕 위에서 나는 재주를 부렸을 뿐'이라며 형에 대한 애정부터 나타냈다.

"그 양반(조중훈)이 머리가 참 비상합니다. 나하고 열두살 차이의 형님인데 같은 원숭이띠예요. 원래 엔지니어인데 휘문고보 3년까지 다니다가 집안이 어려워져 해양대학의 전신인 진해해원양성소에 들어갔어요. 그래서 2등기관사 면허도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손재주가 아주 좋습니다.

집에서 라디오 재봉틀 같은 게 고장 나면 직접 다 고치고. 자동차 피스톤 공장을 한 것도 그런 재주가 있으니까 했던 겁니다. 물론 배도 탔지요. 외항선을 탔는데 1940년대에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를 쭉 다니면서 그때 세계가 이게 아니구나 정말 여러 가지 식견을 넓혔을 거예요.

그런 양반인데 한진이 어떻게 성장했는가는 직접 들으셨을 테니 잘 알겠지만 나하고 펜타곤에 갔다가 식견이 넓으시니까 월남에 금광이 있다고 내다본 겁니다. 그게 사실상 시작입니다."

-부회장님은 언제부터 월남에 뛰어드는 겁니까.

"비서실장 겸 상무 때지요. 내가 53년 6월에 유학 장교로 미국 가서 미 포병학교 교관으로 2년 다시 버클리대학에서 4년 그러니까 미국에서 6년 동안 있다가 59년에 돌아왔어요.

미국에 있는 동안에는 좋은 장군들 만나고 친구들 사귀면서 아주 좋았는데 와서 보니까 그때 한진의 1년 외형이 70만~80만 달러밖에 안 되는 거예요. 물론 당시로서는 적은 돈이 아니지요.

그렇지만 미국에 있을 때 형이 벤츠 타고 다닌다고 자랑해서 굉장히 버는 줄 알았거든. 하하하. 하여간 내가 귀국하면서 같이 일을 했는데 60년에 보니까 수송으로 약 170만~180만 달러가 되고 무역까지 228만 달러를 벌었어요. 그때 삼성이 제일모직.제일제당 한국유리가 판유리 공장 이런 걸 했고 우리는 수송을 중심으로 했지요. 운송부문에서는 최고였어요.

그러면서 61년에 서울~인천 간을 운행하는 고속형 한진버스 사업을 한 겁니다. 누구도 생각 못했을 때 아이디어였지요. 그러다가 월남파병으로 시끌벅적하니까 이 양반이 펜타곤에 가자고 하시더니 66년에 월남 가라고 하잖아요. 하하하."

조중건 상무를 미국인들은 '찰리 조'라고 불렀다. 어쩌면 한국인보다 미국인들이 그를 더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도 미국 생활에서 보여준 그의 친화력 때문일 것이다. 본인도 부인하지 않았다.

"나야 한국군에서 통역장교로 2년 미국 포병학교에서 교관으로 2년 버클리대학에서 4년. 그러니 한국군도 알지 미국 군대도 알지 대학도 미국에서 다녔으니까 월남 가서 수송 물량 교섭하라는 형님 얘기는 당연한 거지요.

미국 사람 만나봐야 미국 대학 나왔을 거고 미군들 만나봐야 포병학교 출신 아니면 보병이거나 수송병과일 텐데 한 사람 건너면 다 아는 거 아닙니까? 거기다가 형님이 수송 사업하면서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이 월남에도 많이 있을 거고. 그러니까 안 될 일이 없겠다 싶은 거지요.

한국군도 웬만한 장군들은 거의 미국 포병학교에서 위탁교육을 받았다구요. 내가 박 대통령도 광주 포병학교 때부터 잘 알았지만 나중에 미국 포병학교 교관으로 있을 때 마침 거길 유학 오셔가지고 6개월을 같이 있었어요.

나를 무척 아껴주셨고 미국에서 고생한다고 친동생처럼 챙겨주고 그러셨어요. 지금도 생각이 많이 나는데…."

-국내서 통역장교도 하셨고 포병학교 교관까지 하셨으면 군 인맥이 상당했겠군요.

"이런 얘기를 하면 우리 국군의 역사이기도 한데 5.16 때 박 대통령과 행동을 같이했던 많은 사람이 사실은 광주 포병학교 출신들이에요. 그게 어떻게 된 건가 하면 그때가 52년이지요.

많은 고참 대령들이 광주 포병학교에서 단기 특별교육을 받았습니다. 왜 그랬느냐 군사고문단이 볼 때 전쟁은 해야 하는데 한국군 화력이 엉망인 겁니다. 화력이 전혀 없었잖아요. 한국군을 보강시켜야 되겠는데 전차부대도 없지 포병도 없지 굉장히 고민했다구요.

원래는 1개 사단에 4개 포병대대가 지원을 해 줘야 되거든요? 3개 대대가 실전을 하고 1개 대대는 예비대대로 있어야 되니까요. 근데 포병이 1개 대대밖에 없었단 말이죠. 그래서 미 군사고문단에서 1개 사단에 4개 포병대대를 만드는 겁니다. 급조하는 거지요. 그런데 사람이 있어요?"

-사람이 없다니요 무슨 얘기입니까?

"그때까지 포병은 워낙 TO가 조금밖에 없었기 때2 겁니다. 그게 배경인데 그때 박경원(전 내무부 장관) 이기건 김동빈 송석하 그런 분들이 광주에서 특별교육을 받은 거예요.

박 대통령은 광주 포병학교에서 교관을 했고. 나중에 총무처 장관을 지낸 심흥선 그분은 교장을 했고 국방장관을 지낸 노재현 장군은 부교장으로 계셨죠. 그때 내가 광주포병학교에서 심흥선 교장의 보좌관 겸 통역관으로 있었으니까 자연히 그 사람들하고 친하게 될 거 아닙니까.

그런 인연으로 한국군도 웬만하면 다 아는데 5.16 일어나고 나중에 보니까 전부 아는 사람들이지 뭡니까 하하하."

한진은 운을 타고난 셈이었다. 찰리 조로 알려진 조 상무가 마침 귀국해서 한진에 있었다는 것도 이미 짜여 있는 운명의 설계도처럼 착착 손발이 맞아 들어갔지만 한진이 월남 진출을 결정했을 때는 미군의 투입도 절정에 달할 무렵이었다.

군 병력이 대량 투입된다는 것은 그만큼 하역과 수송해야 할 물량이 늘어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한진으로서는 쾌재를 부를 일인 것이다.〈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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