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9] 운도 척척···미군 친구가 병참 책임자 소개
'소개장에…텔렉스에…' 이중삼중 안전장치
군경력 많았던 조상무 인맥 월남사업 큰 도움
사실이 그랬다. 파월 한국군이 68년 12월 28일 발표한 종합 전적만 해도 2년 동안 사살이 2만1000명이 넘는다고 했을 정도니까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미군이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는 것까지 지켜봐야 했을 테니 펜타곤의 전략물자 투입 계획은 사실적이었고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정보를 파악하고 정부 보증까지 받아가며 새로운 장비를 대거 구입해 월남 진출을 계획해 왔던 한진인데, 출발 직전에 믿고 있었던 미군 인맥이 힘을 쓸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다는 소식을 듣게 됐으니 조 상무로서는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치열한 전장에 뛰어들어 일감을 확보하는 것은 무엇보다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였고 한진의 사운이 걸린 문제였다.
그런데 미국에서부터 오랜 친구였고 여차하면 ‘빽줄’로 생각했던 ‘하인카스’라는 부사령관이 월남에서는 병참담당 부사령관이 아닌 전투담당 부사령관이라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조 상무는 맥이 쭉 빠지더라고 했다. 말하자면 수송을 담당하는 병참담당 부사령관이 하나 더 있다는 얘기였다.
“정신이 번쩍 나더라구요. 내가 급하면 하인카스 장군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는데 헛짚었다 이거죠. 더구나 마이클 장군 이 친구도 빈소리를 하는 친구가 아니에요. 정확히 판단해주는 거지요.
자기가 모시고 있던 병참담당 부사령관을 워싱턴에서 월남까지 에스코트해서 사이공에 모셔놓고 일부러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친구라고 나를 찾아왔는데, 내가 월남 간다고 하는 마당에 허튼소리나 할 리가 있겠어요?
솔직히 눈앞이 깜깜해져요. 친구니까 좋은 데 가서 한잔하자고 그러는데 그 소리도 싱겁게만 들려요. 구정에 문 다 닫았지 좋은 곳이 어딨느냐고, 너도 헛짚었다고 꽥 소리치며 웃었지만 나는 속이 타는 거지요.”
-하필이면 출발을 하루 앞두고 그런 소식을 들었으니 참 난감하셨겠습니다.
“난감한 정도가 아니라 깜깜했지. 한진으로서는 첫 해외 진출이고, 더구나 전쟁 중인 나라에 대규모 수송 인력과 수송 장비를 투입하겠다는 상황 아닙니까. 우리로서는 사운을 걸고 많은 준비를 해왔고. 그런데 갑자기 기댈 곳이 없어졌다고 생각해봐요. 미칠 노릇 아니겠어요.
근데 참 희한해. 내가 사업은 운이 착착 맞아 들어가야 된다는 얘기를 했지만 때마침 그 친구가 서울에 오지 않았으면 어떡할 뻔했어요? 하인카스 장군만 믿고 덜렁덜렁 갔을 거 아니오. 물론 급하면 하인카스 장군한테 병참담당을 소개받을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사업은 그게 아니거든. 한번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수송이니까 무조건 병참담당 부사령관을 꽉 잡아야 되고 유대를 계속 해나가야 한단 말이에요.
그러자면 병참담당 부사령관이 진짜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소개를 받아야 돼요. 근데 마이클이 왔잖아요.
그 친구가 병참담당 부사령관의 심복처럼 가깝다고 했단 말이죠. 이게 운이에요. 자기가 대령 때 모셨던 장군이 ‘앵글라’라는 바로 그 병참담당 부사령관이라는데 그 친구가 내 옆에 앉아 있단 말이야. 그게 절묘하지 않아요?”
-워싱턴에서 사이공까지 직접 동행해서 모셨다면 보통 사이가 아니었겠군요.
“남녀 사이도 그렇게까지 하기가 어려운 거 아닙니까. 워싱턴에서 사이공이 어딘데. 그 얘기를 듣는데 머리를 탁 치는 거지, 하하하. 당장 소개장 하나 쓰라고 그랬지요.
그런데 술집에 타이프가 있나? 펜도 없어요. 그래가지고 옛날 군인들이 보고서 올릴 때 쓰던 누런 종이가 있어요. 파란색 선이 죽죽 그어져 있고. 거기에 장군들이 겨드랑이 밑에 꽂고 다니는 노란 연필이 있는데 그걸로 좌우간 알아보지도 못하게 소개장을 꾹꾹 눌러 썼어요.
서로 막 웃고 말이지. 그걸 받아 넣고 다시 부탁을 했어요. 워싱턴에 돌아가면 앵글라 부사령관한테 나를 특별히 소개하는 텔렉스를 쳐 줄 수 있겠느냐고. 이중삼중으로 안전장치를 해놓는 거지요. 그랬더니 기꺼이 ‘슈어’. 그게 나중에 진짜 월남에서 먹히는 겁니다. 하하하.”
조 상무는 평소에 인적자원의 대부분을 형인 조 회장이 닦아놓은 것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월남에서는 군 경력이 많았던 조 상무의 인맥이 큰 도움을 주었다고 실토했다.
-결과적으로 출발 전에 이미 병참담당 부사령관을 소개 받은 셈이니 절반은 성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습니다.
“마음이 좀 놓였던 건 사실이고, 인맥을 자꾸 얘기하면 거북스럽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 월남전에 뛰어들 때는 그게 아주 중요한 거예요.
수송 얘기를 하기 전에 내가 장황하게 여러 가지 배경 설명을 하는 건 어떻게 돼서 미국 용역회사들도 있는데 다 물리치고 수송사업을 할 수 있었는지, 그걸 알아야 이해가 빠를 것 같아서입니다.
원래 운수업하고 산판업(山坂業)은 투기라고 했을 정도로 위험도 따랐지만 반은 운으로 한다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그랬는지 그 당시 우리나라의 사회상도 한진 편이 돼 줬다구요.
이게 무슨 얘기냐, 그때 우리 사회가 얼마나 엉망이었어요? 그게 오히려 한진한테는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는 거지요.
얘기한 대로 나는 59년 11월에 귀국했지만 그 사이에 조중훈 회장이 57년부터 미군 군수물자 수송사업을 독점하고 있었다고 했잖아요? 근데 그때 집으로 초대하고 선물 주고 그런 것도 미군들하고 친목을 다지고 유대를 깊게 가지는 계기가 됐겠지만 그보다 미군 수송감들을 우리가 다 살려준 셈이라구요.” <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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