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총과 엽서

그의 전단지는 자기소개나 선전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데이브가 출마할 지역인 애너하임, 오렌지, 비치시티들과 어바인, 레이크포리스트 시에 이르기까지 오렌지카운티 안의 여러 동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앞으로 일어나야 할 일은 무엇인지,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거기에 대한 데이브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내용들이 들어 있었다. 의료보험, 환경, 노숙자 등 여러 가지 당면한 사안에 대해서 나같이 뉴스와 담을 쌓고 사는 사람에게도 정보를 알려서 눈을 번쩍 뜨게 하는 전단지였다.
그 중에서도 “권총 판매는 오렌지카운티 박람회에 마땅치 않다!”는 전단지는 나를 놀라게 했다. 오렌지카운티 박람회는 우리도 아이들이 어릴 때 가곤 했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핫도그와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며 페리스 휠을 타고 가족이 하루를 보내는 곳이다. 자기가 키운 엄청 큰 호박이나 농산물 자랑하기 대회, 돼지 빨리 몰아달리기,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수채화 그림, 도자기 전시회 등 온 가족이 동심으로 돌아가는 박람회다.
원래는 어린이들에게 농사를 권장하고 자연을 사랑하라는 취지에서 시작했다는 이 대회에 어쩌다 살상무기 판매가 끼어들어 왔을까? 박람회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어린이들과 가족들이 어떤 미친 사람의 총격에 피를 흘리고 쓰러지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데이브 민은 주상원의원이 되면 먼저 어린이들의 안전을 위해 박람회에 무기 진열을 금지하는 법을 발의하겠다고 했다.
그런 데이브의 입장을 무기업자들이 그냥 보고만 있을까. 무기업자들은 총포 규제법을 지지하는 정치가는 낙선되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데이브는 왜 법대교수와 학자라는 안정되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를 지키기보다는 막강한 세력과 돈을 가진 무기업자들 앞에 마주 설 생각을 했을까.
정치가로서 살상무기 판매를 규제하는 법을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발의하겠다는 것은, 어쩌면 사랑하는 아내와 세 어린 자녀를 둔 한 가정의 가장인 그에겐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미래인 어린이들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어느 아버지와 남편이 죽음의 총구를 막으려 하지 않겠는가. 데이브의 부인도 변호사로 가정폭력에 희생당하는 여인들을 위한 일을 하고 있다고 하니 그들 가족의 신조가 어떤 것일지 가늠이 된다.
데이브의 출마를 위한 모금파티에 다녀온 후로 큰일은 못해도 엽서라도 써야겠다고 생각했던 터라 딸더러 알아보라고 했더니 데이브 민 사이트를 카톡으로 보내왔다. 우선 환하게 웃고 있는 봉사자들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가슴에 ‘DAVE MIN’ 이름이 크게 쓰인 티셔츠를 입고 있는 분도 있었다. 둥그런 테이블에 둘러 앉아 웃으며 열심히 엽서를 쓰고 있는 모습이 젊은 사람들 같아 자세히 보니 노인들이다.
라구나우즈의 봉사자들이라고 했다. 라구나우즈에는 내가 아는 분들도 살고 있어 혹시나 낯익은 성씨가 눈에 뜨일까 하고 봉사자 명단을 보니 컴퓨터 설명서에나 보일 듯한 바코드라는 성을 비롯하여 와이어트, 밸런타인, 레포우스키, 칸다사미, 스파도니, 수그레인스, 골드스타인 등 모두 긴 성들이다. 단음절인 성은 ‘수’와 ‘롤’ 뿐 내가 찾는 성은 보이지 않았다. 명단을 아래위로 되풀이해 훑어보며 그동안 총선거 때 투표만 하면 국민으로의 의무를 다 했다고 생각한 나 자신이 돌아보였다. 봉사자 노인들은 엽서를 쓰며, 의무를 넘어서서 이 나라의 장래를 움직이는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들이 둘러앉은 테이블 위에는 써놓은 4000장의 우편엽서가 종이 박스에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 어느 날에는 450장을 써서 유세 기간 중 하루 만에 쓴 엽서 수의 기록을 세웠노라고 스스로를 축하하며 기뻐하는 장면도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한자 한자 정성들여 쓴 그 엽서는 기계가 쓴 것과는 다를 것이다. 거기엔 쓴 이들의 정성과 염원이 담겨있다. 마치 그 작은 엽서 한 장 한 장이 총구에서 나오는 총알을 막아주는 방패처럼 느껴졌다. 4000개의 엽서가 4000개의 총알을 막을 수도 있다. 데이브가 주상원의원이 되고 총기규제 법안이 통과된다면, 그 엽서는 4000,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생명을 보호하는 방패가 될 것이다.
딸이 알아본 바로는 엽서 쓰기는 끝났고 이제 캔버싱과 텍스팅만 남았다고 했다. 캔버싱은 가가호호 찾아 문을 두드리는 것이고 텍스팅은 전화로 문자를 보내는 것이란다. 문자 보내기! 그건 나도 할 수 있다. 카톡의 잡담으로 단련된 내 손가락이 이렇게 쓸모 있게 될 줄 몰랐다.
박휘원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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