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간단히 마치고 차를 마시며 창문을 여니 푸르른 하늘이다. 마침 토요일이어서 누리는 호사다. 햇살은 제멋대로 온 누리를 헤집고 다닌다. 눈이 부셔서 가는 눈을 뜨고 간간이 떠가는 구름을 본다. 베란다 입구에 걸어놓은 휘장이 건들거린다. 아내는 장 보러 집을 나서고, 나는 긴 밀대 끝에 청소용 종이를 부착하고 마룻바닥을 닦았다. 머리카락이 한 움큼이다. 맨발에 거치적거리는 것이 없으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몸이 편하면 마음도 같이 편해지기도 한다. 반드시 그렇지 않을 때도 있으니 하는 말이다. 한동안 백수 노릇 해봐서 잘 안다. 몸은 편했는데 마음은 불편했다.
사람은 부족해서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 먼지도 있어야 닦고, 접시도 자꾸 무엇이 묻으니까 닦는 것이다. 나 자신을 보면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애쓰는 것이다. 조금 더 나아지고 싶어서 살아가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모두가 말을 한다. 하지만 자주 나는 눈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은행 잔고. 얇은 지갑 속 지폐. 하얀 머리가 늘어나는 내 모습. 눈에 띄는 차가운 시선. 표정 없는 사람들의 줄지은 거리 행진. 화려한 조명. 가난한 사람들의 초라함.
자신이 크게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들 때문에 그럴 것이다. 물질적인 풍요함은 확실히 눈으로 보인다. 반대로 물질적인 궁핍함도 눈에 선명하게 보인다. 지금 세계의 가치관이 물질적인 것에 치중되어 있어서 마음의 위로를 찾는 종교의 장소에서도 차별이 존재한다. 있는 사람들은 거룩해 보인다. 없는 사람들은 언제나 궁상맞고 비굴해 보인다. 가진 사람들은 그만큼 열심히 일하고 애써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것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보이는 것들의 풍요함을 부러워하는 순간 비참해지는 것뿐이다. 소유욕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신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소유하고 싶어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잃을 것도 없다. 그들은 어디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신이 인간에게서 추구하는 정신적인 세계의 가치관은 지금 세상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그래서 창조주는 사람 속에 마음이라는 창고를 창조해 놓았다. 세상의 아픔으로부터 사람들이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소중한 것들을 보이지 않는 마음 곳곳에 숨겨 놓았다. 이것은 나의 일방적인 생각임을 밝힌다.
20세기 영국의 거장 시인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는 만약 사랑에 성공했다면 가난한 언어 같은 것은 버리고 하루하루 만족하며 살아갔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문학은 가난한 사람들의 다친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신비한 도구인 것 같다. 내 가슴에 ‘어린 왕자’를 심어준 작가 ‘생텍쥐페리’는 소설에서 말한다.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세상이 아직도 살 만하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들은 누구나 다 문학가이다. 노래로 흥얼거리고, 글을 쓰고, 춤을 추며, 온 마음을 다하여 부족한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감히 말한다. 지켜야 하는 소중한 것들은 오직 마음으로 봐야만 볼 수 있다고. 먼 훗날 우리 삶에서 무엇을 가져갈 것인가? 그것은 내가 얼마나 남들을 사랑했는가 하는 추억일 것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소중한 기억들은 결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마음에만 새겨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