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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20] '한진이 미군 수송장교들 살려준 셈'

한국에 온 보급물자 부대까지 절반이상 도난
한진이 책임수송으로 미군 수뇌 근심 덜어줘

-의외의 내용이군요. 한진이 미군 수송감을 살렸다니 금시초문입니다.

“이런 얘기 아마 첨 들을 겁니다. 6·25 이후부터 60년대, 70년대까지도 그랬지만 미군의 모든 물자, 기름과 군수품이 전부 인천으로 들어왔어요.

그러면 미군 수송부에서 부평으로 수송하고 부평 보급창에서 문산, 동두천, 의정부, 그리고 서울에 보급을 했다구요.

그런데 그때 한국 사회가 엉망 아닙니까. 미군 트럭들이 부두에서 부평까지 보급품을 나르는데 중간에 반은 다 없어져. 한참 가다 보면 언제 귀신이 타고 있었는지 트럭 뒤에 타가지고 다 던지는 거요. 하하하.

미군부대에 도착해서 보면 반 남으면 잘 남은 거고 3분의 1이나 되나? 그러니까 미군들이 펄펄 뛰는 거지요.

보급창에 쌓아둔 기름도 어느 날 보면 ‘도라무통’(드럼통)이 저절로 구르네? 사람은 안 보이는데. 그걸 훔치느라고 땅굴을 뚫고 지하수 관로를 타고, 그야말로 별짓을 다 하는 거예요, 한국 사람들이. 그런 시절입니다.

아마 그때 땅굴 팠던 놈들이 전부 북한으로 갔을 거야. 그러니까 초소가 있는데도 휴전선에서 땅굴을 귀신같이 팠지? 하하하.”

-분실되는 것을 한진이 막았다는 겁니까?

“막은 정도가 아니라 살려줬다니까요? 무슨 얘기냐, 전부 도둑을 맞고 그럴 때, 우리 조중훈 회장이 미군 보급창 대장을 만나 아이디어를 냈던 겁니다. 그게 한진이 수송사업을 하게 된 계기고, 미군 수송감들을 살린 거예요.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대장, 걱정하지 마.

내가 실어줄 게. 내가 수송 전문업자야. 물건 잃어버려? 그건 내가 변상해주겠어. 당신은 수송비만 내.’ 몇 t을 몇 마일 나르는 데 얼마다 하는 기준이 있을 것 아니겠어요. 그걸 내라는 거지.

그렇게 해도 도둑맞는 물자보다 수송비가 더 싸고, 물건을 잃어버리면 한진에서 돈으로 해주든가 물건으로 변상을 해준다는데 얼마나 좋아요. 그러니 보급창 대장이 생각할 땐 기가 막힌 제안이지. 그렇지만 반신반의해요. ‘잃어버렸는데 어떻게 물건으로 변상해?’ ‘양키시장에 가면 있잖우. 도둑맞은 건데 그게 양키시장으로 다시 나오지 어디로 가겠수?’ 하하하.

보급창 대장이 그런 조건이라면 좋다 이거죠. 도둑을 자꾸 당해서 죽을 지경이고 만날 얻어터지고 시말서 쓰고 모가지가 달아나게 생겼는데 구세주가 나타났다 이거야.

그게 결국 수송감들을 살린 것이고, 한진이 미군 물자를 맡은 계기고, 월남에서 그때 인물들을 다 만났으니 미국 용역회사들이 있는데도 전부 물리치고 우리가 수송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기업의 성장은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정부의 지원책을 제외해 놓고 본다면 한진은 기술력이나 자금력으로 기업을 인수하거나 합병해 거대화를 이룬 것이 아니라 인맥이 밑거름이었고, 거기에 창업주의 독특한 아이디어와 기회 포착이 기술력과 자금력 이상의 힘을 발휘했다는 얘기다.

기업은 곧 사람이고 인맥은 곧 인연인데, 창업주부터 인맥을 중시했기 때문이겠지만 월남 진출에서 성공을 거둔 것도 예외일 수 없다는 얘기로 들리는 부분이다.

조중건 고문은 이런 얘기도 덧붙였다. 한진그룹에서 드러내지 않고 있는 자산이 있다면 그것은 누구도, 어느 기업도 따를 수 없는 세계적인 인맥이라면서, 한진이 대한항공도 인수하고 오늘날의 한진그룹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 겉으로는 분명히 월남 전쟁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시작하는 셈이지만 내막적으로는 사람하고의 인연이 한진을 성장시킨 힘이었다는 것이다.

“인연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설명하려니까 얘긴데, 내가 버클리 대학에 입학할 수 있도록 편지도 써주고 장학금 알선도 해주고 그랬던 사람이 있어요. 우리가 월남에 진출할 때도 펜타곤에서 결정적인 정보와 도움을 준 사람인데 ‘레이칸(Laikan)’이라는 중령이 있습니다.

그 사람하고 오랜 인연이 따지고 보면 사실상 그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도록 나를 키운 겁니다. 내가 53년 당시 철원 5사단 포병부대에서 송찬호 장군하고 복무할 때 그 부대 고문관이면서 미 펜타곤의 연락장교로 와 있던 사람이 바로 레이칸 중령이에요. 닉슨 부통령도 직접 편지를 보내올 정도로 레이칸과 친해요. 그 사람하고 내가 전방에서 막사를 같이 썼어요.

영어를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레이칸도 내가 필요했지요. 좁은 천막 속에서 세 끼 식사 같이 하고 친형제처럼 생활했는데, 많은 사연이 있지만 그때의 인연이 결국에는 월남까지 숱한 도움을 주고 그랬거든? 그러니 한 사람의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 겁니까.”

아마도 월남에서 레이칸과도 뭔가 이루어지는 모양이었다. 마침내 조 상무는 월남으로 향했다. 도착해서 보니까 정말 아는 사람투성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첫날부터 현장을 누볐다고 했다.

상황파악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찌 보면 미군이 한진을 위해 문을 열어놓은 것 같았다. 왜냐하면 당시 맥나마라 국방장관이 미국에서도 천재라고 했을 정도인데 월남에 부두 시설이 전혀 없는 상태를 간과했다라는 것이다.

“병력은 비행기로 투입될 수도 있고 걸어서라도 이동하면 되지만 보급 물자는 선박이든 비행기든 수송을 하면 즉각 하역이 돼야 전쟁을 할 거 아닙니까.

그런데 하역 시설이 전무하다고 할 정도로 엉망이더라구요. 그걸 고려하지 않고 막 쏟아 부었으니 말이야.

그러니 그게 전부 돈인데, 이 양반(맥나마라)이 한진을 위해서 모른 척했나? 그런 생각까지 들더라구, 하하하. 그래가지고 나로서는 좌우간 사람이 자본이고 막 밀어댈 작정이었으니까 부사령관부터 찾아 나설 판이에요.

솔직히 정부가 월남 참전을 결정한 건 우방을 돕고 반공을 하기 위해서지만 사업하는 우리는 전쟁하는 나라에서 돈 좀 벌어 경제부흥을 하자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어떡하든 일감을 콱 물어서 주머니에 넣는 게 장땡이란 말이요. 그러다 보니 시간이 없어요.

친구가 써준 소개장은 신주 모시듯이 넣어놓고 그때 주월 대사가 신상철씨인데, 그분도 공군 소장으로 예편하셨는데 공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내셨고 대단한 분 아닙니까. 한 사람만 거치면 다 알잖아요. 인사를 드려놓고, 우선 한국대사관 바로 뒤에 있는 앰배서더 호텔에 숙소를 정했어요.”

그러나 조 상무의 친화력과 활약이 아무리 뛰어나고 인맥이 두터워도 미군만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수송사업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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