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우리말] 익숙하다
우리말 ‘익숙하다’는 구성이 특이한 단어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순우리말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한자가 숨어 있습니다. ‘익다’라는 말에 익을 ‘숙(熟)’이 합쳐져 있는 말입니다. 재미있는 단어입니다. 이렇게 우리말에는 한자어가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굳건하다, 얄팍하다’도 비슷한 구성으로 보고 있습니다. ‘굳다’에 ‘건(建)’, ‘얇다’에 ‘박(薄)’이 붙어서 새로운 단어를 만들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저는 익숙하다는 단어를 볼 때마다 한자가 참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했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익숙해진 겁니다.익숙해지는 것은 어떤 일을 여러 번 자주 해 보면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처음에는 서툴지만, 자꾸 하다 보면 편해지고 잘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 관계에도 익숙하다는 말을 씁니다. 처음에는 낯설고 어색하였지만 자주 만나고, 같이 있다 보면 익숙해집니다. 서로 편해지는 겁니다. 저는 익숙해지는 것은 좋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도 사람도 편해지기 때문입니다. 오래 함께 있는 사람에게 익숙해지는 것은 때로 이해와 배려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익숙해지는 상황을 달리 표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단어의 의미는 전혀 다르지만 ‘싫증’이 그런 상황에서 사용됩니다. 여러 번 자주 하다 보면 오히려 귀찮아지고, 하기 싫어지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싫증이라는 말은 싫다는 것과 관련이 있는 말입니다. 단어의 모습을 보면 싫어지는 병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처음에는 좋았는데, 정말 맛있었는데, 그렇게도 설레었는데 이제 싫습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그런 상황을 병이라고 생각했겠네요. 말끝에 ‘-증(症)’을 붙여 놓았으니 말입니다.
‘식상하다’는 말도 ‘익숙하다’의 부정적인 면입니다. 보통은 음식을 여러 번 먹어서 물린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매일 반복해서 먹으면 질리게 됩니다. 먹고 싶기는커녕 오히려 뱉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식상(食傷)이라는 한자에는 먹어서 탈이 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식상도 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의학에서는 식상을 음식을 먹은 뒤 복통을 일으키거나 토하는 경우라고 하여 아예 병으로 부릅니다. 물론 식상하다는 것과 병 식상은 다른 의미입니다만, 여러 번 하여 물리는 것도 싫증처럼 일종의 병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싫증이나 식상하다의 공통점은 처음부터 싫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새로운 맛에 놀라고 감탄하기도 하였을 겁니다. 어떤 경우에는 잘 몰라서 당황하기도 하고 실수도 있었을 겁니다. 힘들었지만 즐거운 경험이었겠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첫 마음을 잊습니다. 그래서 싫증이 나고, 식상해집니다. 이게 음식이면 다행인데 사람이면 문제가 큽니다. 미움의 원인이 되고, 오해의 원인이 됩니다. 결국에는 이별로 끝이 나기도 합니다. 답답한 일입니다.
식상하다를 우리말로 표현할 때는 ‘물리다’라고 합니다. 사전적 정의를 보면 ‘다시 대하기 싫을 만큼 몹시 싫증이 나다.’라고 설명이 되어있는 것으로 봐서 싫증과도 통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물리다의 어원을 생각해 보니, 도로 준다는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주려는 사람에게 돌려주는 것이니 음식의 경우라면 안 먹겠다는 표시가 될 겁니다. 물건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듯 사람의 관계도 무로 돌아가려는 듯합니다. 사람은 없던 것으로 되는 게 아니라 더 나빠지는 것이겠죠. 오랜 만남이 식상하지 않고, 물리지 않고, 싫증 나지 않기 바랍니다. 익숙해지고 오히려 날로 새로워지기 바랍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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