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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22] '민간인' 조중건 미군헬기 '빌려달라'

한국군 선무작전으로 베트콩 무력화
'차단과 섬멸' 전술 런던타임스 극찬

-그런데 미군은 탐색과 섬멸이라는 전술을 주장했다는 말씀이군요.

"미군의 지휘를 받았다면 그렇게 했겠지요. 나는 그게 아니니까 우리가 독자적으로 하겠다고 싸운 거고. 미군들은 탐색과 섬멸이 전략전술이니까 밀림에 들어가서 슬슬 찾고 다닌다구요.

탐색하는 거지요. 베트콩들은 다 지하 동굴에 숨어버리고 움직이지를 않는데. 그러니 전과가 별거 없어요. 미군이 지나가고 나면 마을 일대를 다시 활보하는 겁니다.

백년 해 봤자 끝이 안 나요. 그러다가 이놈들 혼을 좀 내줘야 되겠다 하면 전부 총만 딱 내놓고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밀림이라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요. 그러다가 자기 앞으로 베트콩이 지나가는 게 보이면 딱 한 방을 쏴요.

두 방 이상은 안 쏩니다. 두 방 쏘게 되면 위치가 발각되니까 딱 한 방만 쏴요. 그러면 한 명 죽는 거예요. 적막이 흐르다가 저쪽에서 또 한 방 총소리가 나면 한 명 죽어요.

그러니까 정말 무슨 유령이 전쟁을 하는 것 같다구요. 물론 포탄을 쏘기도 하고 대대적인 폭격도 하지만 그럴 땐 전부 지하 동굴 깊숙이 들어가 있으니까 끄떡도 안 해요. 미군들이 물러가면 다 나오고.

그렇게 되니까 주민들이나 정부군이나 미군에게 절대 협력을 안 합니다. 인민들 속에 게릴라들이 있는데 협력을 했다가는 미군이 돌아간 후에 반역으로 몰아 그 자리에서 재판하고 맞아 죽는데 어떻게 협력을 해요."

-한국군은 어떤 방법으로 분리 작전을 합니까?

"우리는 주민을 보호하면서 선무작전을 펼친 거죠. 그걸 평정사업이라고도 했는데 결국 주민들의 협조도 얻고 성공했죠. 미군들은 베트콩 집결지인 부락을 중심으로 기지를 형성하고 거기다 포격을 가하고 헬리콥터로 쑥대밭을 만들지만 베트콩은 하나도 안 죽고 노인네들 아낙네들 어린애들만 당해요.

근데 우리 한국군의 캐치프레이즈는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1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거였다구요. 미군사령관이 100명의 베트콩을 놓친다는 것은 싸움을 안 하겠다는 거 아니냐고 항의도 해왔지만 그건 당신들 생각이고 우리 전략은 다르다 그거죠.

우리 선무작전이 당시 월남 신문에도 크게 나고 월남 사람들이 그렇게 고마워하고 그랬지만 우리는 베트콩 마을이 있다 하면 완전 포위해놓고 방송만 하는 겁니다."

-런던타임스에서 그 당시 파월 한국군에 대해서는 극찬을 하지 않았습니까.

"한국군에게 월남전을 맡겼더라면 6개월 내에 다 종결되었을 것이라고 썼죠. 단순히 베트콩을 유인하기 위해 선무활동만 한 게 아니라 주간에는 대민 활동까지 했어요. 베트콩 마을에 가서 환자도 치료해주고 마을마다 불교 사원이 있는데 종교라는 것은 국경을 초월하잖아요.

베트콩들이 다 파괴한 사원을 우리 장병들이 전부 재건해주고 우리가 농기구도 많이 가져갔거든? 같이 가서 농사를 짓는 거예요. 탈곡도 해주고. 그러니까 따이한 한국군이 옆에 있으면 든든하고 걱정이 없는 거지요.

물 걱정 없지 식량 걱정 없지 치료해주지 농사 도와주지. 베트콩이 마음대로 마을에 들어오지를 못해요. 베트콩이 들어오면 주민들이 신고를 해준다구요.

그렇게 되니까 그게 결국은 우리 기업들 한진이 그때 제일 많이 들어왔었지만 우리 기업들과 노무자(당시는 근로자라는 용어가 일반화되지 않았다)들이 안전하게 작업을 할 수 있게 되고 음으로 양으로 주민들 도움을 굉장히 받게 되는 겁니다. 현지 사정은 주민들이 제일 잘 아는데 그쪽 부락으로는 가지 마라 그쪽 길에는 베트콩 있다고 가르쳐 준다구요. 그게 얼마나 큰 도움입니까."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수송사업을 하려면 미군의 협조를 얻는 게 필수적이었다.이런 사실을 조중건 상무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설사 한국군 측에서 이에 대해 약간의 불만이 있더라도 사업가 입장에선 사활을 걸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한국군도 경제 발전에 기여하려고 월남까지 날아온 사람에게 대놓고 이래라 저래라 할 입장도 아니었다. 조 상무는 맨 먼저 막역한 친구인 하인카스 부사령관부터 찾는다.

"사이공 항의 사령관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마침 나하고 문산에서 같이 근무했던 카노 오리바라고 그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래? 당장 찾아갔지. 진짜 반갑게 만났어요. 한참 웃고 얘기하다가 헬리콥터를 빌려 달라고 했어요. 왜냐 민간인은 퀴논에 갈 수가 없어요.

군복도 스몰 사이즈로 한 벌 달라고 말이지. 그랬더니 나보고 돌았다고 그러네? 군인도 아닌 민간인한테 누가 헬리콥터를 빌려줘요. 더구나 사이공에서 퀴논까지가 서울에서 제주도보다 조금 멀어서 기름을 두 번이나 넣어야 돼요. 완전히 더위 먹었다 이거야 하하하.

그렇지만 방법이 없잖아요. 당신 전속 부관이 나를 데리고 가는 식으로 하면 될 거 아니냐고 냅다 소리를 질렀더니 웃으면서 빌려줘요. 퀴논으로 가니까 30여 척이 정박되어 있어요. 배가 석 달도 좋다 넉 달도 좋다 그러고 있는 겁니다. 배 주인은 상관 안 해요.

하역이 되든 말든 매일 5000달러씩 받으니까. 그러니 선주는 걱정 없고 미국 정부만 골탕을 먹는 거지요. 근데 보니까 하역하는 미국인들이 있긴 있는데 용역회사 사람들을 데리고 왔는지 엉망이야.

미국인들이 거기서 무슨 일을 해. 다 물러 터져가지고 말이지. 그때만 해도 누가 베트콩인지 몰라서 월남사람들을 하나도 못쓸 때예요. 그러니 그걸 내가 놓칠 수 있어요? 우리로서는 결정적인 찬스 아닙니까."〈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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