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기자노트]팬데믹으로 알게되는 것들

Washington DC

2020.11.13 09:22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현대 모든 학문의 시조라고 평가받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언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아마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일 것이다.
그리스어 원문에서 ‘사회적’에 해당하는 단어는 사실 폴리티코스(Politikos)인데, 직역하면 ‘인간은 폴리스적인 동물이다’쯤이라고 한다. 폴리스는 당시의 도시 국가를 지칭하는 것이고, 영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사회적(Social)’이란 단어로 의역된 것이다. 어쨌든 인간이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정치, 사회적 동물이라는 평가에 지금까지 커다란 이견이 제시된 적은 없다.

이렇게 어우러져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수개월째 섬처럼 고립돼 있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단절이 초래하는 영향이 점점 커지고 있다.
잘 드러나지 않던 관계성의 부조화와 소통의 부재가 서서히 그러나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학교나 직장 등으로 하루에 예닐곱 시간씩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 온종일 좁은 공간에서 부대끼다 보니 충돌하는 것이다.
대화의 주체가 되는 양측이 서로에 대해 잘 파악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 때 소통의 효율은 극대화된다.

서로에 대해 잘 파악한다는 것은 상대방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손자병법은 지피지기(知彼知己)를 설파했고, 철학의 아버지 격인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일갈했다. 소통의 어려움은 어쩌면 흔한 농담처럼 ‘나도 나를 모르는데’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이민자로 살면서 우리는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입에 달고 산다. 백인, 흑인, 히스패닉 등 다른 인종과 어울려 살면서 제자리를 찾기 위한 자구책이다.
하지만 사회 활동이 제한되면서 가족끼리 지내는 동안엔 ‘한인 정체성’은 굳이 상기할 필요가 없다. 우리끼리는 다 아니까. 가장 가까운 가족/친지 사이에서는 정체성 대신 ‘자아상’이 더 활약해야 한다.
부모님의 아들/딸이자, 한 남성/여성의 배우자이며, 자녀들에겐 부모가 되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면 부모님, 배우자, 자녀들과의 소통에 간극이 생기기 시작한다.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사람들끼리 서로 자기주장만 펼치는 일상이 반복되다 보면 지치게 마련이고, 지치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하는 행동은 상대방을 비난하는 일이다.
현재 상황이 뭔가 마음에는 안드는데, 만일 그게 상대방의 잘못인 경우 내가 뭘 고쳐야 하는 수고로움을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싸운다. 싸우다 지치면 외면하고 빗장을 닫아걸어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방어기제의 발동은 양날의 검이다. 밖으로부터의 공격을 차단하는 동시에 나 스스로 그 안에 갇히는 결과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소통의 부재와 사회적 단절로 인해 좀 먹은 자아가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 스스로를 해치는 것은 어쩌면 나 없이도 잘 돌아가는 세상을 향한 가장 소극적인 복수인지도 모른다.

온라인 수업 때문에 청소년들의 정신적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스트레스가 가족 간의 마찰로 이어지고, 불화와 소통의 부재를 거쳐 신체적/정신적 고립으로 심화되는 일만은 막아야 한다.
무척 안타깝게도 스마트 시대에 들어서면서 아이들은 이미 부모 세대보다 적어진 대면 교류와 상호 작용의 경험을 끌어안고 가야 한다. 한인 이민 가정의 아이들은 거기에 더해 부모의 제한된 사회 참여로 인한 네트워킹 기회 감소 또한 짊어져야 한다.
어떠한 제약을 감수해야하는지는 알아주지 않으면서 남들보다 나은 성적과 성취를 기대하는 것은 부당한 일임을 부모 세대는 깨달아야 한다.


김은정 기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