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18년 전 KBS-2 TV에서 6개월 동안 목·금 드라마로 방송되었던 ‘삼일의 약속’ 원작자다.
미국 LA 근교에 있는 롱비치 메모리얼 병원에서 심장과 의사로 38년간 재직하고 있는 내가 최근 병원 식당에서 동료 의사들과 점심식사를 하던 중 메이저 TV의 뉴스를 통해 한국 국회의원들이 의사당에서 치고받으며 난장판을 벌이는 참담한 모습을 보면서 참을 수 없어 이 글을 쓴다.
우리 민족이 치욕의 일제 강점에서 벗어나 8·15 광복을 맞은 지 64주년이 되는 오늘, 나는 과연 이것이 내가 목숨을 걸고 지킨 조국의 모습일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더구나 조국방위의 첨병에 선 육군사관학교의 적지 않은 생도들이 대한민국의 주적은 북한이 아닌 미국이라는 답변을 했다니, 이것이 진정 부모형제와 생이별하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찾아 남하한 후 생사를 넘나들며 지켜낸 조국의 참 모습이어야 할까. 나는 깊은 자괴감으로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첨단 IT기술로 전 세계를 누비며 삼성·LG 등 한국 상품들이 세계시장을 주름잡고 현대·기아 등 한국 자동차가 세계의 거리를 달리고 골목을 누비는 21세기의 조국이 어찌 자랑스럽지 않겠는가.
나는 64년 전 오늘(8월 15일) 만주 하얼빈에서 어머니와 누이들이 기뻐하던 모습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일본 천왕의 떨리는 목소리를 아직도 어제의 일인 양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당시 13살이었던 나는 그후 가족과 함께 고향인 함경북도 주을로 돌아와 학교에 다녔다. 1950년 6월25일 일요일 새벽 4시 ‘폭풍’이라는 전쟁 신호와 함께 전 북한군이 탱크를 앞세워 남쪽으로 밀고 내려간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로 다음날 김일성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지금 남쪽에서 북으로 치고 올라오기에 우리 북한군은 남쪽과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됐으며 오는 8월15일에는 해방전쟁의 승리를 위한 축제를 서울에서 갖겠다”고 말하는 것을 분명히 들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당시 나와 함께 자유를 찾아 남하해 우리 수색중대에 배치된 중대원 156명 가운데 휴전 후 살아 남은 동료는 겨우 26명에 불과했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살아난 것은 기적이었다.
나는 군에서 나와 갖은 역경 끝에 메디칼스쿨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진출했고 심장 전문의가 돼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북한에 남겨둔 가족들, 특히 나를 몹시도 사랑하셨던 어머니와 헤어질 때 “3일 만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그 약속을 지키려고 각고의 노력을 한 결과 드디어 1983년 그 기회를 갖게 되었다.
33년 만에 꿈에 그리던 고향을 찾아 누이들은 만날 수 있었지만 나를 그렇게 못잊어 하시던 어머니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어머니와 약속을 지키지 못한 한(恨), 아쉬움과 그리움을 안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와 마치 드라마같은 나의 일생을 영문판으로 엮어 출판했다. 그 책의 제목은 ‘The Three Day Promise.’
이 책은 당시 미국의 유명한 언론인 디어 애비가 1200개의 메이저 언론에 소개하는 바람에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됐고, 나는 하루에도 5000여 통의 격려편지를 받을 정도였다.
나는 책의 판매대금 전액(50만 달러)을 워싱턴 한국전쟁기념탑 건립에 기증했고 기념탑 건립식에 초대돼 당시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큰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8·15 해방, 6·25 동족상잔의 비극 등 숱한 역경을 겪으면서 오늘날까지 살아온 우리 조국이 역경을 이겨낸 민족답게 경제적인 번영 뿐만 아니라 보다 성숙하고, 보다 존경받는 국회의원 또는 지도자를 가진 국가로 비쳐졌으면 하는 바람과 충정에서 이 글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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