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25] '운송회사가 하역까지 맡아 속다탔죠'
100일 안에 준비 못하면 페널티
장비·인력 조달하느라 생고생
그런 과정에서 수의계약을 위해 조중건 상무는 미군사령부의 계약관 교체를 시도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젊어서 그랬는지 그는 계약관 교체 요구가 어떤 파문을 일으킬지를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실제로 조 상무 이름이 구체적으로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미군에서는 미군 인사 발령을 한국인 찰리 조가 낸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고 그것이 한국군사령부와 우리 대사관에도 전해진다면 한진에 대한 이미지가 썩 좋게 작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의계약을 했다면 원청사는 미군이 됩니까?
"원청과 하청의 개념이 아니지요. 우리 단독계약인데 따지자면 미군이 원청사가 되지만 미군이 해야 할 일을 우리가 대신 맡아서 해주는 직영회사가 되는 셈이에요. 건설을 한 사람들은 미국의 RNK라고 미국의 건설업체 하청을 했지만. 그러니까 우리 경우는 미국하고 직접 원청 계약을 해서 우리가 직영을 했기 때문에 하청에 따른 시끄러운 건 없었어요.
인력도 자체적으로 전부 모집을 하고. 우리가 주로 했던 일은 수송을 중심으로 트럭을 우리가 사서 운전 정비 하역장비 등을 계약하고 물건은 뭐가 어느 위치에 얼마가 있다 하는 검사요원들까지 우리가 배치하는 것이지요."
직접적인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벌써 40년이 넘은 지금에서 되돌아봐도 조중훈 회장이 월남과 미국을 위해 은연중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던가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코멘트가 조 상무 얘기 속에서 나오고 있는 셈이었다. 자유 월남을 지키고 탄약과 군수물자를 긴급 수송해 미군의 승리를 뒷받침할 수 있는 기본 인프라를 조 회장은 한진 스스로 갖추도록 지시했다는 뜻이었다.
-100일 이내에 모든 준비를 갖추겠다고 약속을 하셨는데 그 사이에 준비는 할 수 있었습니까?
"그게 정말 우리 회장이 할 일이었어요. 그런데 사실 우리는 그때까지 수송은 전문업체였지만 하역은 경험도 전문지식도 없었어요. 그래 가지고 나로서는 한두 번 들어갔나? 거의 월남에 있으면서 회장하고 연락만 하는데 회장한테 긴급히 알렸지요. 문제는 하역이다 회장이 해결을 해줘야 되겠다고.
근데 회장이 그때는 하역장비도 모르고 하역작업도 어떻게 하는지 모르니까 직접 잠바 걸쳐 입고 인천에 나가서 하역하는 걸 살펴보고 배우는 겁니다. 일본 요코하마에도 가서 도대체 하역이 무엇인지 견문을 넓히고.
나는 또 100일 동안에 해결 못하면 페널티를 물어야 되니까 일본 회사 미국 회사들을 쭉 조사해서 하역장비들을 발주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미국 회사는 장비 주문을 하면 공장에서 생산하는 기간만 100일이 걸린다는 겁니다. 그걸 월남까지 수송해 온다고 하면 또 한 달 이상 걸릴 거 아니오. 큰일 났어요."
조 상무로서는 당장 하역장비부터 속을 태웠다고 했다. 주문에서 생산까지 그리고 월남으로 이동하려면 아무리 계산을 해도 약속했던 100일 안에 모두 갖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는 큰소리치면서 제안서를 냈던 것이 아찔할 정도로 막막했고 또 회장에게 긴급 타전을 해야 했다는 것이다.
"계산을 해보니까 약속을 못 지켜 40여만 달러 변상을 하게 생겼는데 돈도 돈이지만 첫 사업부터 신용이 떨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알아보지도 않고 제안서부터 낸 것이 경솔했다 싶기도 하고 낙담도 되고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겁니다. 누워 있으면 박정희 대통령과 장기영 부총리한테 우리 회장이 질책을 듣는 것도 상상이 되고 미치겠어.
부사령관이 눈앞에 왔다갔다 하고 워커 중령 그 녀석도 비웃는 것 같고 말이지. 근데 우리 회장이 참 빨라요. 형이지만 그때 회장을 진짜 다시 봤어.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오사노 겐지라는 일본의 유명한 경제인이 있습니다.
그 양반이 이스즈(ISUZU) 자동차 대주주인데 우리가 한국에서 버스사업을 하면서 가깝게 지냈어요. 나중에 들었는데 그분한테 회장이 직접 찾아가서 사정 얘기를 한 겁니다. 그랬더니 일본 사람이 주문해 놓은 걸 오사노 겐지 그분이 웃돈을 주고 우리한테 빼주더라는 거지요.
그걸 아무나 할 수 있어요? 나는 속만 타들어갔지 상상도 못했어요. 그런 걸 볼 때 아무나 회장 하는 게 아니구나 싶고 회장이 가만 보면 결정적일 때 꼭 힘을 써요. 그러니까 그만한 인맥과 인덕이 있었던 거예요."
조 상무는 첫 시장을 열기까지가 제철소 고로에서 첫 쇳물을 쏟아낼 처녀공(處女孔)을 여는 과정도 이렇게 힘든 준비와 각고의 노력이 필요할까 싶더라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하역장비는 준비가 됐다는 조 회장의 연락을 받았지만 이번에는 또 노무자들 모집이 생각처럼 되지 않더라는 것이다.
"수송계약을 해놓고 시동을 걸려니까 이건 정말 하나에서 열까지 시원하게 뚫리는 게 없어요. 노무자를 데려온다는 게 또 걸림돌이야. 현지에서는 누가 베트콩인지 모르니까 아예 모집을 할 수가 없는 거고 더구나 1달러라도 우리 국민이 벌도록 해야 하니까 국내에서 데려와야 되겠는데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모집 자체가 힘들게 돼 있는 겁니다.
해외에 나가서 하는 사업 아닙니까. 당시만 해도 여권을 만들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더라 그거지요. 그런 걸 보면 정부가 참 답답한 것이 입만 열면 애국하자 달러를 벌어와야 된다고 하면서 대문을 걸어두고 있는 꼴이니 말이지.
해외로 돈 벌기 위해 나간다는데 그까짓 여권 만드는 게 뭘 그렇게 제약이 많고 까다로워야 됩니까. 6.25 때 부역 나간 사람이 집안에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안 돼. 그땐 그랬다구요. 그래서 다급하니까 우리 회장한테 박 대통령을 찾아가라고 했지요."〈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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