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26] "박 대통령 찾아가 인력 수출 부탁했죠"
미 포병학교서 박 대통령과 생활
5·16 주체들과 별장서 친분 쌓아
"펜타곤 갔다 와서 정부 보증도 받아냈으니까 우리 회장도 박 대통령 열정을 잘 알잖아요. 기업하는 사람이 정치인들하고 가깝다고 말하면 사회가 이상해서 정경유착부터 먼저 떠올리는데 그 당시는 그게 아니에요. 박 대통령이 얼마나 경제부흥에 전념했습니까.
매일 건설현장 체크하고 매일 기업들이 달러 벌어올 수 있도록 하라고 경제부처 독려하고. 그런 차원이라구요. 솔직히 한진 입장에서는 월남 진출이 사운을 건 도전이었지만 회장 입장에서는 대통령의 집념 때문에 진출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마음이 반은 됐을 겁니다.
물론 5.16 이후에 내가 박 대통령을 비롯해 JP(김종필)부터 박종규씨까지 혁명주체 20여 명을 우리 회장한테 소개를 한 적이 있고 같이 술좌석에도 참석하고 그랬기 때문에 그 어른의 집념을 누구 못지않게 이해하고 있었겠지만 어쨌든 우리가 워낙 급했으니까 대통령을 찾아가라고 한 거예요."
조 상무는 정부의 움직임까지는 모르고 있었을는지 모르지만 정부는 이미 65년 3월 당시의 내각조정실 김좌겸 차장 엄익호 상공부 공업2국장 강중경 국방부 과장 등으로 구성된 조사단을 사이공에 파견해 시장조사를 하면서 인력수출에도 대비하고 있었다.
정부는 65년 월남 수출 목표액을 1400만 달러로 책정해 놓고 있었지만 김좌겸 차장을 단장으로 하는 그들의 조사보고서대로 만약 미군의 지상 장비들을 정비한다거나 수송 하역 보관 등을 위한 기술자 파견이 가능하다면 외화 획득이 훨씬 더 늘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까지 가진 것이 사실이었다.
시장보고서가 긍정적으로 나오자 힘을 얻은 정부는 한.월 간의 '경제각료회의'를 제안하고 1차 회의를 거쳐 66년 1월 11일부터 3일간 사이공에서 2차 경제각료회의를 열어 장기영 부총리를 수석대표로 해서 원용석 무임소장관 김정렴 상공차관 그리고 월남정부에서 트롱 타이톤 경제장관과 부서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수송 문제까지 거론하며 외화 가득을 위해 총력전을 전개했던 것이다.
물론 이 자리에서 특정업체 한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수송이라면 당시로서는 한진밖에 마땅한 기업이 없었기 때문에 누가 들어도 한진을 거론한 셈이었고 더구나 한진은 정부가 기대하는 외화획득 기업 리스트에 올라 있었던 만큼 한진이 수혜를 입을 것은 분명했다.
-박 대통령과 조 회장님이 언제부터 가까운 사이로 발전했습니까?
"5.16 직후지요. 그 당시 혁명주체들이 회의를 하려고 해도 마땅한 장소가 없어 자하문에 있던 우리 회장 별장에서 자주 모였어요. 그때만 해도 자하문 그쪽은 벌판인데 돌담을 만들고 근사하게 별장을 지어놓으니까 미군들이 선물한 양주도 있지 고기도 있지 곧잘 모인 거지요. 그래서 더 가까워지고 경제 문제로 고민하시는 걸 많이 들었을 거 아닙니까.
우리 회장이 또 자기는 웃지도 않고 남을 웃기는 입담이 얼마나 좋습니까 하하. 그러니까 친해지지. 내가 일전에도 얘기했지만 나는 미국 포병학교에 있을 때 박 대통령하고 같이 생활했잖아요. 그분이 일본말로 하면 마지매(眞面目.진지하고 성실함)예요.
선생을 하셨기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날 아주 아껴주셨거든. 하여간 그래 가지고 우리 회장이 박 대통령도 만나고 장기영씨도 찾아가고 장기영씨가 무척 도와줬다고 들었지만 좌우간 막 서둘러서 결국 인력수출은 통과가 됐어요. 그 덕분에 기술자 운전수 하역인부들까지 우리가 전부 모집을 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기는 부분도 있다. 66년 이 당시에는 이미 해외개발공사가 설립되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65년 10월 6일 보사부의 감독을 받는 '한국 해외진출진흥회'가 설립됐다.
같은 해 11월 3일 재단법인으로 개편돼 76년 4월에 '해외개발공사'로 명칭이 바뀌지만 이미 해외진출진흥회 설립 첫해부터 미국 벡텔사와 알코사에 불도저 기술자 3000명의 인력을 수출해 왔듯이 설립 목적은 명칭이 바뀌기 전이라도 차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왜 한진의 인력수출은 정부의 리스트에 올라 있었으면서도 제동이 걸렸을까 하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벡텔과 알코사에 보낸 인력은 기술자들이었고 한진은 주로 단순 노동력이었다는 것뿐인데.
그러나 그런 차이 때문만이 아니었다는 것은 시간이 흘러 한국인 노무자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켰을 때 비로소 정부가 왜 여권 발급에 제동을 걸고 있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는 내막이 나오는 것이다.
사실 조 상무는 여권 발급에 필요한 신원 문제를 언급했지만 신원조회에 걸려 여권을 내주기가 어렵다면 해당자만 제외하면 될 일이었기 때문에 여권 발급이 원인은 아니었다. 정부는 사실상 냉가슴을 앓고 있었지만 이유가 있었다.
지나가는 말처럼 가볍게 언급됐지만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가 안 될 때 해외개발공사(해외진출진흥회)를 통해 외국회사로 취업 나간 기술자들은 1인당 500달러의 계약이었다.
기술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행정보조직 모집이 최저 월급 375달러였고 어떤 외국회사는 최고 1000달러라는 안내문까지 붙여 놓았다. 그런데 회사마다 임금이 들쭉날쭉하긴 했지만 한진은 얼마가 될지 의문이었다.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다시 말해 미국 업체에 진출한 한국인 기술자들과 한국 업체에 진출한 기술자들이 똑같은 월남에서 일을 할 때 정부는 임금과 수당 차이 때문에 심각한 마찰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직선적으로 표현하면 정부가 달러를 많이 벌어들일 수 있는 기업으로 한진을 선두기업으로 분류하면서도 한진의 임금 수준 때문에 인력수출을 저울질하고 있었다는 얘기였다.〈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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