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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느끼며] 뱀 때문에

San Francisco

2009.09.01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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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비교해 미국이 좋다고 생각한 건 녹색지대가 많다는 것이었다. 주택가는 말할 것도 없고 상가지역에도, 공장지대에도, 사람이 생활하고 머무는 곳이라면 빠짐없이 조성되어 있는 화단과 잔디밭, 그리고 빽빽하게 우거진 숲이랑 나무들 말이다. 한국이었다면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팻말이 어김없이 붙어 있을 녹색지대. 그 푸른 잔디밭과 숲과 나무 속에 사람들이 어울려 지내는 것을 보면서 ‘미국은 생활과 자연이 하나로 된 나라구나’하고 느꼈다. 작년에 이곳에 다니러 왔던 동생들도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문 밖만 나서면 만날 수있는 푸른 잔디밭과 숲과 나무는 진짜 부럽네. 이 동네에 있는 나무들과 숲만이라도 내가 사는 도시에다 옮겨다 놨으면….”

그런데 나는 조깅과 걷기 운동을 시작한 이래 이 나무들과 숲들 때문에 괴롭다. 걸핏하면 출몰하는 뱀 때문이다. 어딜 가나 나무와 숲이 정글처럼 우거져 있으니 뱀들이 서식하기 딱 좋지 않은가. 이놈의 뱀들은 공원이나 주택가나 차도나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내가 운동을 시작한 이후로 목격한 뱀 숫자를 다 따지면 적어도 오십 마리는 되지 않을까.

며칠 전에는 회사 주차장에서도 큰 뱀 한 마리를 보았다. 무심코 주차장을 어슬렁거리며 걷고 있는데 어디서 길고 빠른 물체가 쉬이익, 하는 소리를 내면서 내 발 밑으로(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내 두 다리 사이로) 지나갔다. 기겁을 해서 보니 누렇고 갈색 빛이 나는 뱀이었다.

으아악! 세상에 태어난 이후 그렇게 큰 비명을 질러보기는 처음이다. 나는 발에서 신발이 벗겨져 나가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삼십육계를 했다. 그때 마침 바깥에서 담배를 피우던 동료들이 그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도망가서 풀숲에 숨은 뱀을 찾기 시작했다. 나뭇가지로 풀을 이리저리 들치던 남자 하나가 곧 소리를 질렀다.

“여기 찾았어. 그런데 이 놈, 독사야!”
회사는 삽시간에 비상이 걸렸다. 물리면 치명적인 상해를 입는 독사란 놈이 주차장에 나타났으니, 그것도 다른 데로 도망도 가지 않고 주차장 풀숲으로 숨어버렸으니 비상이 걸린 건 당연했다. 아무도 주차장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고 법석을 떠는 가운데 연락을 받은 동물보호 관리국 직원이 나타나 뱀을 생포했다. 모두들 고개를 빼고 유리창으로 그 모습들을 구경했지만 나는 무서워서 엄두도 못 냈다.

그런데 어느 짓궂은 남자 동료가 잡힌 뱀을 사진으로 찍어 회사내의 전자우편으로 돌렸다. 무심코 사진을 열어보았던 나는 그 날 밤 악몽에 밤새도록 시달려야 했다. 사진 속의 그 뱀이 나를 쫓아와 내 발뒤꿈치를 자꾸 물어뜯는 악몽에.
사진 속의 뱀은 적어도 2m는 넘을 것 같았다. 굵기가 내 팔뚝만했고 머리는 세모였는데 철사로 만든 기구로 모가지를 잡혀서인지 입을 있는 대로 크게 벌리고 있었다. 쩍 벌린 입 속에서 송곳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빛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바람처럼 내가 그 뱀을 지나쳐 도망갔기에 망정이지 까딱하면 그 날카로운 이빨이 내 발을 물 수도 있었지 않았나 싶었다. 더구나 그 날 나는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으니.

내게 특정대상에 대한 공포증(Phobia)이 있다면 긴 몸을 가진 생물에 대한 것이다. 길더라도 발이 있는 것, 즉 도마뱀이나 지네 등은 괜찮은데 뱀이나 지렁이 등 발이 없는 파충류는 너무 무섭고 두렵다. 내가 회사의 점심시간을 이용해 운동하는 산길에도 자주 뱀이 나타나는데 올해만 해도 벌써 세 번이나 목격했다. 참 희한한 것이 그 길을 이용해 운동을 하는 사람이 나 말고도 몇이나 더 있는데 유독 그 놈의 뱀은 내 눈에만 뜨인다는 것이다. 더구나 나는 코앞의 사물도 분간 못할 정도로 지독히 눈이 나쁜데도 말이다.

“살피지 말아. 살피니까 눈에 뜨이지….”
남편 말로는 풀이나 나뭇잎이랑 똑같은 색을 하고 있는 뱀을 내가 자주 보는 것은 이놈이 나타나나, 안 나타나나 눈에 불을 켜고 살펴보기 때문이란다. 어쨌든 요즘 나는 뱀이 동면하는 겨울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이계숙(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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