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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28] "정부선 노무자 파업 진작에 예상했었지"

불상사 막을 보완책 없이 노동자들 출국
외국 회사와의 임금·생활 환경 차이 심해

66년 5월 26일 이때부터 한진 공식 명칭은 '한진상사 월남지사'였다. 새로운 수송장비와 하역장비를 대규모로 발주해 퀴논항에 쏟아 내린 것은 퀴논을 중심으로 수송사업을 하되 물량만 있으면 월남 어디든 가겠다는 야심의 표출이기도 했다. 그래서 조 상무도 그 본보기를 퀴논항에서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수송대원 100명이 일주일 걸린다는 일을 32시간 만에 하역을 마쳤다면 굉장한 강행군을 했군요. 그런 광경이 미군 사령부에도 보고된 겁니까?

"월남이 생기고 그렇게 많은 새로운 장비들이 투입되는 건 처음이었을 거고 엄청난 광경인데 현장에 미군 수송부대원들이 있었으니까 상부에서 보고는 받았겠지요. 나도 사이공에 가서도 얘기를 하고 부사령관한테도 직접 보고를 했어요.

우리가 100일 약속을 했는데 96일 만에 장비가 도착했으니 능력이 이 정도다 하는 것도 알리면서 자신감도 보여야 할 거 아닙니까. 그랬더니 역시 수송 경험이 있는 회사라 다르다면서 기대가 된다고 그래요. 그런 반응이 나오니까 기분이 좋잖아요.

그때 내가 무리한 요구를 좀 했는데 '이제부터 당신들을 제대로 도와주려면 군용비행기를 막 타고 다닐 수 있는 패스가 있어야 되겠소. 그것 좀 주시오'라고 했어요. 민간인으로서 군용비행기를 타고 다니겠다는 게 말이 돼요?

정신 나간 소리지. 그런데 사령부에서 볼 때 장비들도 엄청나게 들어왔지 뭔가 제대로 될 것 같지 전쟁을 하자면 서둘러야 되지 생각보다 쉽게 오케이야. 하하하. 그 덕분에 전쟁하는 나라에서 민간인이 군용비행기 얻어 타고 돌아다닌 건 내가 처음일 거요. 흐흐흥."

-결과적으로 약속한 기일 내에 장비는 준비를 완료했지만 수많은 노무자의 숙소나 근로 조건은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불행한 일이 일어났던 걸로 압니다만….

"에이~잘나가다가 뭘 그런 얘기를 해. 그것도 역사니까 해야 되나? 한진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대기업 모두가 그랬지만 우리 한국이 건국 후 오늘날까지 경제적으로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었다는 걸로 이해해줘야 합니다.

어느 나라나 불행한 경험 없이 성장한 나라가 없잖아요. 미국도 그랬고 영국도 그랬고 러시아까지도 격한 파업이 있었으니까. 성장 과정에서는 어느 나라나 다 있었는데 해외 진출 경험이라고는 전혀 없던 60년대 그 시절에 파업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게 교훈이 됐고 수업을 받은 셈이니까 나쁘게만 평가할 게 아니라고 봐요."

조 상무는 기억하기가 유쾌한 일은 아니라면서 성장 역사의 한 과정에 있었던 일인 만큼 이해를 돕기 위해서도 한 번쯤은 짚어야 되겠고 정확한 전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월남에서 있었던 일은 시점 상으로 보면 조금 뒤에 일어났고 결과적으로 보면 오해에서 비롯된 겁니다. 잠시 스트라이크가 있어서 신상철 대사가 수습하느라고 참 많이 수고했고 우리 회장도 최선을 다해 최대한 노무자들 불편이 없도록 해주겠다고 애를 무척 썼어요.

그게 되돌아보면 경험이 없었던 내 탓입니다. 왜 불만이 나왔느냐 솔직히 처음에는 장비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무엇보다 장비가 가장 급하니까 작업자들 숙소는 내 머릿속에서 좀 뒷전으로 밀려 있었어요. 그랬는데 비행기로 막 수송이 되니까 정신이 번쩍 드는 겁니다.

수백 명이 들이닥칠 텐데 기본적인 막사와 침구도 준비하지 않았으니 이거 문제가 생기겠구나 그래가지고 즉각적으로 한국군과 미군의 도움을 받아 신속히 해결했지요. 근데 파업은 그 후에 일어났잖아요. 나도 할 얘기가 많지만 가만 보면 오해도 있었고 군중심리도 작용했다구요.

어쨌든 다른 기업체 현장이지만 노무자들이 웅성거리니까 우리 노무자들도 눈을 돌리게 되고 그러는 과정에서 외국 기업들하고 비교도 하게 되니까 몇 사람이 나서더니 난데없이 인간 대접을 안 한다느니 임금이 어쩌느니 그랬던 거예요. 그것도 금방 수습은 됐지만."

사실 기업만 탓할 일은 아니었다. 정부는 노무자들의 파업을 진작부터 예상했었고 그런 점에서 보면 놀라울 것도 없었다. 정부 기관이 외국 회사들을 대신해 파월 기술자들을 모집하면서도 편차가 심한 임금 부문에서 심각성을 우려했지만 불상사를 막을 분명한 제도적 보완책도 없이 출국시켰고 그것이 결국은 파업의 단초가 됐다고 보면 정부의 책임도 큰 것이다.

-근로자들 스스로 오해를 풀어서 신속히 수습된 겁니까?

"물론 개인마다 기대치가 있고 잘못 알고 있었던 것도 있지만 우리 회장이나 나나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처음 대규모 인원을 끌고 해외에 진출하다 보니 미처 생각하지 못해 준비가 소홀했던 건데 가령 그 많은 인원이 일시에 들이닥치니까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게 보통 문제가 아니잖아요.

더구나 덥고 말라리아는 있고. 그렇지만 노무자들도 마찬가지였거든? 그들이 준비해 온 걸 보면 식기나 민간인 담요 정도였단 말이죠. 그런 걸 봐도 그 사람들 역시 처음이라 제대로 준비를 못했으니 우리도 부족했던 걸 그때 느낀 거지만 서로 이해한 거예요."

-군부대의 도움도 받았습니까?

"물론 긴급히 본사에 요청해서 준비가 되지 않은 것들은 본국에서 수송해왔지만 서울에서 보내오기 전까지는 마련할 방법이 없잖아요. 그래서 그때 십자성부대 사령관이 이범준 전 교통부장관이에요. 내가 군대 덕을 참 많이 봤다고 생각하는데 다급해서 그 분을 찾아갔죠. 상황을 설명하고 우리가 준비할 때까지 침구 같은 것 좀 대여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사실 그때 상황은 급했으니까. 우리로서는 비상사태나 다름없었거든요."〈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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