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공감] 매 순간이 고난이며 동시에 영광이다
이제는 오해를 풀 법도 한데 아직도 의외로 많은 사람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성경 욥기의 구절을 하나님의 약속쯤으로 여기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마도 이 구절은 문맥과 의도를 무시한 채 자신의 바램을 투영하여 성경을 이해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기독교인에게 이렇게 사용되는 것은 비단 성경 구절만이 아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라는 속담이 성경에 있는 말씀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는 설문조사 결과에 놀란 기억이 있다. 그 속담은 성경에 적혀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복음과는 정반대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속담이기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에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 라는 말을 많이 쓴다. 노래의 제목으로 사용될 뿐 아니라 심지어 설교의 제목으로도 사용된다. 전 세계적인 위기의 팬데믹도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라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말이 정녕 그러한지 복음에 비추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이 말은 성경 구절이 아닐 뿐더러 그 출처도 불분명하다. 다윗과 솔로몬의 야사를 적은 유대 문서에서 나온 것이라는 추측이 있지만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없다는 것이 학자들의 의견이다. 그저 "기쁜 상황도 지나가니 함부로 교만하지 말고 슬픈 상황도 지나가니 낙심하지 말고 의연한 태도를 가져라" 라는 일반적인 지혜를 담고 있는 속담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속담을 사용하는 문맥을 살펴보면 기쁜 상황이 지나가 버릴 것에 대한 주의보다는 슬픈 상황이 지나갈 것에 대한 기대를 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사자성어로 대신해서 써도 무방한 이 말 안에 있는 위로는 과연 우리의 체중을 실어 기댈 수 있을 만큼 확실한 위로일까.
그럴 수 없다. 성경은 우리의 고난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는 의미 없는 것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매 순간이 고난이며 동시에 영광인 것을 그리고 그것 자체로 충분한 위로인 것을 선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으로 위로를 삼는 자들인가. 앞으로 나아질 미래인가 아니면 이 고통 속에서도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인가. 이 질문에 답하며 이렇게 외치자. "이 또한 영광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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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무엘 / 박사ㆍ데이터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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