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의 환한 고동 외에는 들려줄게 없는/ 봄 저녁/ 나는 바람 냄새 나는 머리칼/ 거리를 질주하는 짐승/ 짐승 속에 살아있는 영혼/ 그늘 속에서 피우는/ 회양목의 작은 노란 꽃망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 우리는 무사했고 꿈속에서도 무사한 거리/ 질주하는/ 내 발 밑으로 초록의 은밀한 추억들이/ 자꾸 꺼져가는데
-박형준 시인의 ‘가슴의 환한 고동 외에는’ 부분
양지바른 쪽에 히야신스가 꽃대를 밀어 올립니다. 개나리 가지 끝이 봉긋해졌습니다. 대지가 심호흡을 하며 크게 숨을 토해내는군요. 살아있는 것들은 뭐든 조금씩 몸을 뒤척입니다. 전술에 능한 바람, 훑고 지나간 길목엔 갖가지 봄의 실루엣이 선명해집니다. 우리는 무사했고, 살아남은 자들끼리 또 한 번 꽃을 피워 보자고 역전의 용사들이 모여듭니다. 양지는 양지대로 그늘은 그늘대로 경험담이 오가며 서로를 격려하며 엄지 척을 하기도 합니다. 겨우내 닫혀 있던 창문이 열리고 소식이 궁금하던 노인들의 안부가 사방에서 전해집니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일말의 죄의식을 갖게도 하는 일, 시간의 벽을 통과하지 못 하고 먼저 죽은 이들에게 마음의 빚이 남아 선뜻 웃음소리를 내지 못하곤 합니다. 해토머리가 유난히 질퍽대는 이유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선반에 쌓여 있던 먼지도 몸을 털며 바람을 타는 삼월, 부풀대로 부풀어 있는 땅은 제 돌기의 힘겨움으로 쩍쩍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부르튼 모공에서 솟아나는 생명들, 봄에는 어디라도 함부로 밟아서는 안 됩니다. 가죽 신발을 신고 터벅터벅 땅을 밟지 마세요. 밑창이 폭신한 신발을 신고 살살 걸으세요. 싹이 트는 대지의 모공은 어디라도 신의 처소, 신성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대지는 겨울을 잊고 푸르러 갈 겁니다. 회한이나 부끄러움까지도 포슬포슬한 미소가 될 것입니다. 소원하던 사이에서도 꽃망울이 맺힐 겁니다. 아무도 시간의 저편을 기억하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살아남은 자들의 전리품인 생의 환희가 땅 위에 가득할 것입니다.
가슴이 울렁이는 것은 살아 있는 자들만의 특권이자 축복입니다. 오늘 내가 살아 있으므로 느끼는 감정의 포말들이야말로 가장 큰 기적입니다. 옴츠려들었던 어깨 위로 쏟아지는 햇살은 우주의 후원입니다. 수억 광년을 지나온 한 줄기 빛, 그 빛으로 존재들은 제 모습을 재현해낼 겁니다.
흰 테이블보를 깔고 가장 좋은 찻잔을 꺼냅니다. 처박아 놓고 쓰지 않던 은수저와 접시를 찾아 닦습니다. 찻물이 우려지는 동안의 고요, 그 짧지만 느린 시간의 포착은 누추한 일상을 향한 예우인지도 모릅니다. 삶은 여러 방식으로 묘사되곤 하지만 ‘살아 있음’ 그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히 환합니다.
반듯이 다림질 된 셔츠를 입고 굽이 낮은 신발을 찾아 신습니다. 탱탱해져가는 숲의 나무들, 세상이라고 부르던 소란한 거리를 향해 먼저 손을 흔들어 봅니다. 우호적이라는 말은 친밀감의 다른 말이지요. 봄의 친화력 아닐까요.
봄에는 지구를 두 손으로 들어 올리고 싶어집니다. 들끓는 울렁임을 손끝으로 느껴보고도 싶어집니다. 폭발 직전의 고요, 아름다움이라는 형태로 발아를 꿈꾸는 삼월의 숨소리로 내 맥박도 빠르게 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