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읽었다. ‘시지프 신화’는 1942년에 발간된 실존철학 에세이다. 작가의 연보를 제외하고 259페이지. 책은 얇고 가볍다. 그러나 챕터는 ‘부조리의 추론’, ‘부조리한 인간’, ‘부조리한 창조’… 온통 부조리로 시작된다.
책은 지루해서 졸음이 오는 정도가 아니다. 읽는 중간중간 다른 책으로 갈아타기를 몇 번. 마침내 책장에서 ‘이방인’과 ‘페스트’를 다시 들추어 보았다. ‘시지프 신화’와 ‘이방인’, ‘페스트’까지 한 작가의 작품 세 권을 책상 위에 펴놓고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이방인’에서 만났던 무감수성의 뫼르소와 기막힌 소설적 발상에 반해 나는 카뮈에 꽂혔었다. 행동과 감정이 제한된 뫼르소라는 한 인간의 무반응이 사건을 일으키는 소설 ‘이방인’을 이해하려면 ‘시지프 신화’를 통하면 된다고들 한다. 카뮈의 철학과 문학 세계를 알 수 있다고.
그러나 도대체 시지프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시지프 신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나는 갑자기 잘살고 있는 내 인생에서 살 가치를 묵상해야 했다. 자살이 답이라는데 참으로 진지하다. 노벨상 작가는 절대 헛소리 안 하실 텐데. 카뮈는 부조리 철학으로 우리를 설득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신앙인. 끝까지 읽어? 엎어? 색연필로 줄을 긋고 책장 사이사이 내 나름 메모지로 표시하는 사이 책은 너덜너덜 누더기가 됐다. 누구에게 빌려주기도 민망할 정도인데 나는 뭘 읽는 거지.
“시지프의 신화에서는 다만 거대한 돌을 들어 산비탈로 굴려 올리기를 수백 번이나 되풀이하느라고 잔뜩 긴장하는 얼굴, 바위에 밀착한 빰, 진흙에 덮인 돌덩어리를 떠받치는 어깨와 그것을 고여 버티는 한쪽 다리, 돌을 되받아 안은 팔 끝, 흙투성이가 된 두 손의 온통 인간적인 확실성이 보인다.”
카를 융은 사람들이 본인 존재의 가치를 찾지 못해 신경증을 앓는다고 했는데 나는 오늘까지 살면서 돌을 산꼭대기까지 짊어지고 올리고 다시 미끄러져서 또 올리는 반복을 했던가. 그럴 거면 인생의 답도 내 안에 있다고 생각하고 지금 지고 있는 삶의 무게를 굴렁쇠로 하면 어떨까. 긴 작대기 하나로 둥근 휠 같은 인생살이를 허리를 쭉 펴고, 두 손이 아닌 한 손으로 죽음의 목적지까지 자연과 더불어, 사람들과 더불어, 카뮈가 ‘정복자’라고 부르는 정신적 존재들과 더불어 신앙으로 휠을 굴려볼까. 실존주의를 중국에서는 존재주의라고 한다는데 이게 더 좋아 보인다.
‘시지프 신화’가 어려워 뒤적인 ‘페스트’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그는 그 기쁨에 들떠 있는 군중이 모르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균은 수십 년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 손수건,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서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