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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느끼며] 미국은 공평한 나라인가

San Francisco

2009.11.16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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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갈수록 감성도 메마르는지 웬만한 일에 나는 눈물을 잘 흘리지 않는 편이다. 슬픈 영화를 봐도 그렇고, 갑작스레 가족을 잃은 사람을 봐도 그렇고, 자연재해로 몇 천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어도 별로 눈물이 나지 않는다. 그저 안됐다는 생각만 약간 들 뿐. 그런데 얼마 전 신문을 보다가 눈물을 흘린 일이 있다. 십만불에 육박하는 신용카드 빚을 몇 년에 걸친 고생 끝에 다 갚았다는 한 미국인 부부에 대한 기사를 읽고서였다. 쌍둥이 아이를 둔 이 부부도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이 다 하듯이 파산해서 빚을 갚지 않을 궁리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부부는

‘어쨌든 우리가 만든 빚이니까 끝까지 책임지자’는 편을 택했다는 것이다. 부부는 빚을 갚는 동안 외식은 생각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옷 한 벌을 사는 것도, 생필품을 구입하는 것도 극도로 자제했다. 남편은 직장을 두군데나 다니면서 오로지 부부가 빚을 갚는 데만 목숨을 걸다시피 하고 살았다고 했다. 그런 지독한 생활 끝에 마침내 산더미 같은 빚을 다 갚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부부의 이야기는 내게 너무나 신선한 충격이었고 감동이었다. 빚을 갚기 위해 어린 자식에게 먹을 것도 제대로 못 사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그들의 피나는 노력이 피부로 느껴지는 것 같아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들이 너무나 기특하고(?) 고마웠다. 니 거냐 네 거냐, 흥청망청 마구 써 젖히다가 갚을 능력이 안되면 손쉽게 파산을 해버리고 마는 요즘 세상에 이런 양심 바른 사람들이 있다니!

작년 봄, 내 옆자리로 이동해 온 C라는 남미 여자가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녀가 굉장한 부자인 줄 알았다. 왜냐면 그녀의 돈 씀씀이가 굉장했기 때문이다. C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일 주일에 한두 번은 반드시 쇼핑을 했다. 신발장의 구두만 백켤레가 넘는다면서도 쇼핑을 다녀온 그녀의 손에는 으레 새 구두박스가 들려있다시피 했다. C는 도시락을 한 번도 싸오는 법 없이 매일 매식을 했고 출근길의 그녀 손에는 항상 비싼 커피 전문점의 종이컵이 들려있었다. 내가 무엇보다 놀란 건 열여덟살인 그녀의 딸이 제 나라 종교의식에 따라 성인식을 했을 때였다. 나중에 사진으로 봤는데 딸의 성인식은 웬만한 결혼식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화려했다. 딸은 물론 온집안 식구와 예닐곱명의 들러리가 드레스와 턱시도를 맞추어 입었고 리무진을 빌렸고 전문 사진사를 고용해 사진을 찍었다. 꽃과 케이크에만 만불을 들였으며 음식값과 부대비용을 합쳐 총 4만불의 비용이 소요되었다고 C가 침을 튀기며 자랑했다.

그녀는 두 번째 결혼인 현재 남편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며 지난 가을부터 인공수정 시술을 받으러 다녔는데 보험이 커버되지 않아 시술 비용으로 매번 5~6천 불을 쓴다고 했다. 그리고 올 여름, 그녀는 드디어 세 쌍둥이를 임신하는데 성공했다. C는 기다렸다는 듯 집 차압과 함께 카드 빚을 파산 처리했다. 진료시 내는 20불의 코-페이가 아깝다면서 회사에서 제공하는 의료보험도 취소했다. 그런 다음 나라에서 제공하는 극빈자 무료 의료보험을 신청했다. 집도 절도 없으니, 더구나 임산부이니 곧바로 무료 의료보험 혜택이 그녀에게 주어졌고 지금 C는 일주일에 꼭꼭 두 번씩 무료로 병원을 다니고 있다. 세 쌍둥이를 가진 특별한 임산부이니만큼 의사를 자주 만나 상태를 체크해야 한단다.

나는 요즘 들어 미국은 공평한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빚 갚고 열심히 세금 내고 산 사람들이 오히려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것 같은 생각에 허탈하고 억울하다. 신용카드 회사에서는 연체자들의 빚을 깎아주거나 이자를 탕감해 주기 바쁘고(원금이라도 받아내기 위해서겠지만) 정부에서는 융자금을 제대로 못 낸 집주인을 위한 구제방안만 앞다투어 내놓고 있다. 그러면 먹을 것 제대로 못 먹고 허리띠 졸라매면서 꼬박꼬박 융자금 갚아나간 사람들을 위해 상이라도 주어야 하지 않을까. 왜 미국 정부의 정책은 오로지 없는 사람만을 위한 것뿐일까. 땀 흘린 만큼의 대가를 반드시 받을 수 있는 나라였던 미국, 이 미국이란 나라가 언제부터 본분과 의무를 다한 사람들이 열외시 되는 나라가 되었던 것일까.


이계숙(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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